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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8. 11. 29, 영국 에든버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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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80. 5. 9, 캐나다 토론토 |
국적 | 캐나다 |
요약 캐나다의 언론인·정치가.
캐나다에서 연방제를 실현하고 프랑스계 로마 가톨릭 교회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토론토에 있는 〈글로브 The Globe〉지의 발행인으로서, 그의 신문이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던 캐나다웨스트(어퍼캐나다, 지금의 온타리오 주)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837년 미국 뉴욕 시로 이주했다가 1843년 캐나다 토론토로 옮겨, 새로 결성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지지하는 〈배너 Banner〉라는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개혁을 지지하는 정치 주간지 〈글로브〉를 발간하기 시작했는데, 이 주간지는 1853년에 일간지가 되었다.
1857년 무소속 자유주의자로 켄트 군에서 출마하여 캐나다 의회에 들어갔다. 의원으로 있으면서 그당시 당연시되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치권력을 비난하여 캐나다웨스트에서 지지를 받았으나, 캐나다이스트(로어캐나다, 지금의 퀘벡 주)에서는 인기를 잃었다. 또한 국교분리운동을 전개하여 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을 위해 따로 떼어두었던 관유지(crown land)를 민간 소유로 만드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캐나다의 모든 학교를 교회에서 분리하여 세속화하려는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캐나다웨스트와 캐나다이스트의 의석수가 인구비례에 따라 다시 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1840년의 통합법은 이 두 지역에 같은 수의 의석을 부여했음) 캐나다웨스트 자유당을 재건하여 1858년에는 잠시 총리직을 맡았다. 영국령 북아메리카 동맹을 주장한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적수인 보수당 총리 존 맥도널드 경과 제휴하여 연립내각에 들어갔다. 그러나 갱신된 미국과의 상호조약 내용에 불만을 품고 각료 자리를 사임했다(1865. 12). 1867년에 의원 재선을 노렸지만 실패했고, 이후 다시는 하원의원에 당선되지 못했다.
캐나다가 북서부의 노스웨스트 준주를 획득하는 데 있어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873년에 상원의원이 되어 1874년에 캐나다가 미국과 새로운 상호조약을 맺는 데 이바지했다. 그는 온타리오 주지사 자리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2차례의 기사작위 수여 제의도 거부한 채 〈글로브〉지에 모든 정력을 쏟았으며, 그러던 중 신문사에서 해고당한 사람의 총에 맞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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