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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615(무왕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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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682(신문왕 2) |
국적 | 한국, 백제 |
요약 백제 의자왕의 아들.
644년(의자왕 4) 태자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태자의 이름이 효(孝)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회요 唐會要〉 백제전에는 숭(崇)으로 되어 있다.
660년 나당동맹군의 공격을 받자 의자왕과 웅진성(지금의 공주)으로 피난했다가 왕과 함께 곧 항복했다. 소정방(蘇定方)이 귀국하면서 의자왕을 포함한 대신들과 주민 1만여 명을 호송해 갈 때 당(唐)으로 압송되었다. 당에서 사가경을 제수받았고, 662년 수군을 이끌고 귀국하여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주류성에서 저항하는 부여풍을 공격하는 데 참가했다. 주류성이 항복하고 백제 저항군이 모두 진압된 뒤 당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웅진도독의 자격으로 664년 유인원(劉仁願)의 주재하에 웅진에서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천존과 함께 화친을 맹약했다. 또 665년에는 신라 문무왕과 취리산에서 2차 맹약을 함으로써 백제고지에 대한 지배를 용인받았다. 그러나 신라를 두려워한 그는 곧 당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뒤 671년 신라는 당과 충돌하면서 사비성(지금의 부여)을 함락시키고 소부리주를 설치함으로써 백제고지를 완전히 영유했다.
당은 677년에 그를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려보내려 했으나 결국 귀국하지 못하고 당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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