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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83년 7월 24일, 카라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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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30년 12월 17일,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근처 |
국적 | 라틴아메리카 |
요약
남아메리카 크리올인(人) 군인·정치가.
별칭은 El Libertador.
개요
누에바그라나다(지금의 콜롬비아·베네수엘라·에콰도르를 통틀어 말하며 1819년 당시 콜롬비아 또는 그란콜롬비아라 했음)와 페루, 상(上)페루(볼리비아)에서 스페인 통치에 맞서 혁명을 지도했으며, 콜롬비아(1821~30)와 페루(1823~29)의 대통령이자 실질적인 독재자였다.
태생
스페인계 베네수엘라 귀족의 아들인 볼리바르는 부유하고 지체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6년 뒤 어머니마저 여의었으며 삼촌이 유산을 관리하고 가정교사를 구해주며 그를 키웠다. 16세가 되자 공부를 마치기 위해 유럽으로 보내졌다. 3년 동안 스페인에서 살다가 1801년 스페인 귀족의 딸과 결혼했고, 아내와 함께 카라카스로 돌아왔다. 이 젊은 신부는 1년도 채 못 되어 황열병으로 죽었다. 1804년 나폴레옹이 생애 최고 전성기에 이른 해 볼리바르는 유럽으로 돌아갔고 파리에서 어릴 적 가정교사였던 시몬 로드리게스를 다시 만났다.
로드리게스는 그에게 볼테르·몽테스키외·루소를 비롯해 로크·홉스·뷔퐁·달랑베르·엘베티우스 같은 유럽 합리주의 사상가들의 저서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이후 볼리바르의 가슴속에는 라틴아메리카 독립이라는 이상이 뿌리를 내렸다. 그는 로마를 여행하던 도중 몬테사크로의 정상에 서서 조국을 해방시키겠다고 맹세했다. 1807년 미국에 들러 동부의 몇몇 도시들을 돌아본 뒤 베네수엘라로 돌아왔다.
독립운동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운동은 볼리바르가 돌아온 바로 이듬해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해 스페인의 정권을 뒤흔들어놓음으로써 시작되었다.
볼리바르는 여러 반정부 집회에 참가했다. 1810년 4월 19일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스페인 총독의 권력을 빼앗고 총독을 추방했다. 임시정부가 정권을 잡았으며 볼리바르는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런던으로 파견되어 7월 런던에 도착했다. 그의 임무는 영국에게 스페인 식민지 혁명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승인을 받아낸 다음 무기와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었는데 협상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이미 1806년 베네수엘라 해방운동을 혼자 이끌었다가 실패해 망명중이던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를 설득해 마침내 카라카스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지도하도록 함으로써 혁명의 대의명분을 조장했다.
당시 베네수엘라는 들끓고 있었다.
1811년 3월 헌법 초안을 만들기 위해 카라카스에서 전국 의회가 소집되었다. 오랫동안 신중한 심의를 거친 끝에 1811년 7월 5일 의회는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선포했다. 볼리바르는 신생 공화국 군대에 입대했고 베네수엘라의 매우 중요한 항구인 푸에르토카베요를 방어하도록 배치받았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한 부하장교가 스페인군에게 요새를 개방하는 배반을 저질렀고, 이에 총사령관인 미란다는 스페인 총사령관과 협상에 들어갔다. 1812년 7월 베네수엘라 전국을 스페인의 재량에 맡긴다는 휴전조약이 체결되었다.
결국 미란다는 스페인에 넘겨져(볼리바르의 선동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음) 스페인의 지하감옥에서 여생을 보내다 죽었다.
계속 투쟁하기로 결심한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를 떠날 수 있는 여권을 얻어 누에바그라나다(지금의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로 갔다. 그곳에서 그의 첫번째 위대한 정치 보고서인 〈카르타헤나 선언 El Manifiesto de Cartagena〉을 출간해 혁명군이 베네수엘라의 스페인 세력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역설했다(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 드디어 볼리바르는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신생 공화국에 강력한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는 투사로서 이름을 얻기 시작했고 베네수엘라 해방 임무를 맡은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파죽지세의 원정을 수행하는 가운데 벌어진 6차례 격전에서 스페인군을 무찌르고 수도를 되찾았다. 1813년 8월 6일에는 카라카스에 입성해 '해방자'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독재권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독립전쟁은 이제 막 시작일 따름이었다. 1814년 그는 다시 한번 스페인군에 패했다. 스페인군은 호세 토마스 보베스가 이끄는 목동들로, 제대로 훈련받지는 못했으나 실전에서는 난폭하게 잘 싸우는 기병들이었으므로 이들을 물리치기란 불가능했다.
그해 보베스는 카라카스를 점령해 잔인무도한 폭정을 폈다. 이리하여 2번째 베네수엘라 공화국이 막을 내렸다. 볼리바르는 가까스로 미란다가 걸어간 운명을 피할 수 있었으며, 몇 차례 더 교전을 벌인 뒤 자메이카로 도망갔다. 그는 망명 도중 생애 최고의 기록인 〈자메이카에서 띄우는 편지 La Carta de Jamaica〉를 남겼다. 여기에서 그는 칠레에서 아르헨티나, 멕시코에 이르는 웅장한 혁명의 파노라마를 펼쳐보였다. 그는 "우리를 스페인에게 묶어놓은 족쇄는 절단되었다"라고 썼으며, 전체 라틴아메리카에 영국을 본보기로 해서 세습 상원과 선거로 구성되는 하원 및 종신 대통령을 두는 입헌공화국을 세울 것을 제안했다.
특히 마지막 조항인 종신 대통령제는 볼리바르가 내내 집착했던 것으로 그의 정치사상에서 가장 이중적인 면모를 띤 것이다.
누에바그라나다 해방
1815년 스페인은 대서양을 건넌 경험이 있는 최강의 원정군을 반역의 식민지에 파견했다.
사령관은 파블로 모리요였다. 볼리바르는 영국이나 미국에서 지원의 약속을 받아내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지배에서 독립을 쟁취한 아이티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돈과 무기뿐 아니라 따뜻한 환영도 함께 받았다. 3년 동안의 무참한 패배 끝에 승리가 뒤따랐다. 1817년 볼리바르는 오리노코 지역에 혁명본부를 세우기로 했다. 그곳은 전쟁의 포화를 받은 적이 없었으며 스페인군이 들어와 쉽게 그를 몰아낼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는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이 대부분인 수천 명의 외국군인들을 고용했고 안고스투라(지금의 시우다드볼리바르)를 수도로 정했다. 또 신문을 발행했으며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의 혁명군과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의 혁명군을 비롯한 평원의 혁명세력들과 손을 잡았다.
1819년 봄에는 스페인 부왕령 누에바그라나다를 공격하는 기본작전을 구상했다.
볼리바르가 누에바그라나다를 공격한 작전은 군사학의 역사에서 가장 대담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이 소규모 군대(영국 군인들까지 합쳐 약 2,500명)의 행로는 홍수가 휩쓸고 간 평원과 얼음으로 덮인 산맥을 넘는 등 스페인군의 판단으로는 건널 수 없는 위험한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기습을 받은 스페인군은 1819년 8월 7일 중대한 보야카 전투를 치른 끝에 대부분 볼리바르에게 항복했다. 3일 뒤 그는 보고타에 입성했다. 이 사건은 남아메리카 북부의 역사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볼리바르는 불굴의 집념으로 자신의 과업을 하나씩 이루어나갔다. 산탄데르에게 부통령 자리를 주어 행정을 관장하도록 했고 1819년 12월에는 안고스투라에서 소집된 의회에 모습을 나타내어 대통령이자 군사독재자로 승인받았다.
그는 입법부를 재촉해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선포하도록 했다.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3일 뒤 콜롬비아 공화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공화국은 3부분으로 이루어진 연방이었으나 베네수엘라와 키토(에콰도르)는 아직도 왕당파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문서로만 연방공화국이었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최후 승리는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일어난 혁명은 스페인 왕으로 하여금 자유주의 이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고, 이로써 자연히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세력은 기가 꺾였다.
볼리바르는 모리요에게 휴전협상 개최를 요구했다. 두 전사는 산타아나에서 역사적 회담을 열었고 1820년 11월 6개월에 걸친 전쟁을 끝낸다는 조약에 서명했다.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볼리바르는 더 우세한 병력을 가진 자기편이 쉽사리 베네수엘라의 스페인군을 패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라보보 전투(1821. 6)로 카라카스의 관문이 열렸고 마침내 볼리바르의 조국 베네수엘라가 해방되었다.
그해 가을 쿠쿠타에서 콜롬비아 헌법 초안 마련을 위한 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초안의 조항들은 볼리바르를 실망시켰다. 그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그가 창조한 콜롬비아를 지켜나가기에는 헌법이 너무 자유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더 급한 임무에 정신을 쏟아야만 하는 동안은 기꺼이 콜롬비아의 나약한 구조를 참고 견디기로 했다. 그는 산탄데르에게 행정을 맡기면서 계속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다. 그해말 에콰도르가 해방되었다. 그의 이번 원정에는 가장 명석한 부하장교인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의 도움이 컸다.
볼리바르가 오늘날의 에콰도르 수도인 키토의 북쪽 진입로 방어선 산맥에서 스페인군과 싸우고 있을 때, 수크레는 태평양 해안을 출발해 내륙으로 진군해왔던 것이다. 1822년 5월 24일 볼리바르는 피친차에서 승리함으로써 스페인의 굴레에서 에콰도르를 해방시켰다. 그 다음날 수도가 함락되었고 6월 16일 볼리바르는 수크레의 부대와 합류했다. 볼리바르는 바로 키토에서 자기 삶의 커다란 열정인 열렬한 혁명가 마누엘라 사엔스를 만났다. 사엔스는 볼리바르를 향한 사랑을 거리낌없이 인정했으며 전쟁터에서 대통령궁까지 그를 수행했다.
페루 해방
오늘날의 콜롬비아·베네수엘라·에콰도르에 걸친 그란콜롬비아의 영토가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었으며 새로운 정부는 미국에게 승인을 받았다.
이제 페루만이 스페인의 손에 남아 있었다. 볼리바르와 아르헨티나 혁명가 호세 데 산 마르틴이 만난 것도 페루의 문제 때문이었다. 산 마르틴은 볼리바르가 남아메리카 대륙 북부에서 행한 일을 남쪽에서 이루어낸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벌써 리마에 진입해 페루의 독립을 선언한 상태였다. 스페인군은 고원지대로 후퇴했으나 산 마르틴은 그들을 뒤쫓을 수 없었으므로 볼리바르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은 1822년 7월 26일 에콰도르의 항구도시 과야킬에서 만났다(과야킬 회담). 틀림없이 산 마르틴은 볼리바르에게 군사원조를 요청하러 왔으며, 그밖에 국경문제와 라틴아메리카 정치의 앞날에 대해서도 의견을 모으고 싶어한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각자의 견해와 개성이 달랐기 때문에 공감대가 없었으므로 산 마르틴이 볼리바르에게 감화를 주지 못한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과야킬에서 돌아오자마자 산 마르틴은 리마에서 차지했던 지위에서 물러나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이런 행동이 볼리바르에게 재량권을 주려는 의도에서였는지, 아니면 개인적인 좌절감 때문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바야흐로 볼리바르가 최고의 야망을 이룰 길이 트이기 시작했다. 1823년 9월 볼리바르는 리마에 도착했다. 스페인군은 리마 동쪽 산맥에 진을 치고 있었으며 그곳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보였다. 볼리바르는 군대를 구성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병력·말·노새·탄약을 모았으며 1824년 임시 수도인 트루히요를 떠나 높은 산계(山系)를 오르기 시작했다.
후닌에서 벌어진 중요한 첫 전투에서 볼리바르는 간단히 승리했다. 그 다음 이 작전의 마무리 전투를 유능한 참모장인 수크레에게 맡겼다. 1824년 12월 9일 아야쿠초 전투에서 스페인 부왕은 수크레에게 패배해 전 병력을 이끌고 항복했다.
볼리비아
볼리바르는 이제 그란콜롬비아와 페루의 대통령이 되었다.
대륙의 작은 부분인 상(上)페루만이 아직도 왕당파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이 지역 해방 임무는 수크레에게 떨어졌고 1825년 4월에 그는 임무를 완수했다고 보고했다. 이 새로운 국가는 '해방자'의 이름을 따서 볼리비아라 부르기로 결정되었다. 볼리바르는 천성 때문에 다시 그의 권력주의 성향을 보여주는 헌법을 마련했다. 종신 대통령제, 권력없는 입법부, 극도의 참정권 제한 등이 중심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의 창조물에는 헌신적이었으나 그가 구상했던 사회개혁 기구인 헌법은 실패작이었다.
드디어 볼리바르는 자기 생애의 정점에 다다랐다. 그의 힘은 카리브 해에서 아르헨티나-볼리비아 끝까지 뻗쳤다. 또한 페루에 머무르는 동안 몇 달씩 앓았던 심한 병도 이겨냈다. 그의 또다른 계획이었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연맹은 1826년 결실을 맺었다. 그는 아메리카 공화국들의 나약함을 정확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공화국들이 서로 연맹을 이루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1824년까지 연맹을 위한 조약들이 맺어지고 비준되었다. 이 국가들은 콜롬비아·페루·멕시코 및 중앙 아메리카, 통일 리우데라플라타 등이었다.
1826년 범아메리카 회의가 파나마에서 열렸다. 그러나 애초 볼리바르의 계획에 비하면 단편적인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콜롬비아, 페루, 중앙 아메리카, 멕시코만이 대표를 파견했기 때문이었다. 참석했던 4개국은 연맹조약에 서명했고 다른 국가들에게도 가입하도록 권했다. 연맹의 공동 육·해군이 계획되었고 연합국가를 대표하는 격년 의회가 구상되었다. 가입국간의 모든 분쟁은 조정을 통해 해결하도록 했다. 비록 파나마 회의는 그 성과가 빈약했지만, 장차 라틴아메리카의 연대와 일치를 위한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영역을 통괄하는 기구를 건설하려는 자신의 계획이 겨우 일부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주로 개개 민족국가 입장에서 생각한 반면 볼리바르는 대륙적인 입장에서 생각했던 것이다. 국내정책에서 그는 계속 독재적 공화주의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중심점으로 생각했는데 자신의 말이 더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마자 내전이 일어날 것을 예감했다. 1824년부터 지녀왔던 그의 이러한 예상은 1826년 현실로 나타났다.
내전
베네수엘라와 누에바그라나다는 그란콜롬비아에서 관계 때문에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두 나라의 대표격인 베네수엘라의 파에스와 누에바그라나다의 산탄데르는 서로 대립해 마침내 내전이 일어났다. 볼리바르는 황급히 리마를 떠났으나 대부분의 정부는 페루가 볼리바르의 3년 통치 종식과 콜롬비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사실을 환영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볼리바르는 보고타에 있으면서 산탄데르가 쿠쿠타 헌법을 지지하며, 파에스를 폭도로 규정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그란콜롬비아의 결속을 수호하기로 했으며 이에 따라 파에스에게 양보해 1827년초 그와 화해했다. 파에스는 해방자의 최고 권위에 복종했으며, 볼리바르는 그 보답으로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향한 열정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새 헌법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볼리바르는 그란콜롬비아 대통령직을 맡아 전국 회의 소집을 요구했으며, 전국회의는 1828년 4월에 소집되었다.
그는 선거에 영향을 끼치기를 거절했고 그결과 산탄데르가 이끄는 자유주의자들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볼리바르는 쿠쿠타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 권한도 강화하기를 원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그런 노력을 저지했다. 상황은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한편에서 구헌법은 더이상 효력이 없음을 주장하고 또 한쪽에서는 헌법 개정은 있을 수 없다는 논쟁 속에서 볼리바르는 그란콜롬비아의 독재권을 쥐었다.
9월 25일 밤 한 무리의 자유주의자들이 음모를 꾸며 대통령궁을 습격했으나 볼리바르는 암살자의 단검을 피할 수 있었다. 마누엘라 사엔스가 민첩하게 목격했으므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를 죽이려는 시도는 실패했지만 폭풍우의 전조는 점점 분명해졌다. 게다가 위태로웠던 그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었다. 페루는 과야킬을 합병할 의도로 에콰도르를 침략했다. 수크레가 다시 한번 에콰도르를 구했고 타르키에서 페루군을 무찔렀다(1829). 몇 달 뒤 볼리바르 휘하의 가장 명망있는 장군 호세 마리아 코르도바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볼리바르는 옛 측근들이 하나씩 자기를 배반하는 것에 몹시 상심했다. 프랑스·영국·미국이 내정에 간섭했고 마침내 1829년 가을 베네수엘라는 그란콜롬비아에서 떨어져 나갔다.
볼리바르는 못마땅했지만 자신의 존재가 자기가 독립을 이루었던 나라들의 국내외 평화에 대한 위협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1830년 5월 8일 유럽으로 도피할 작정으로 보고타를 떠났다. 대서양 해안에 도착해, 후계자로 키웠던 수크레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볼리바르는 한없는 슬픔에 빠졌다.
유럽행 계획은 취소되었고 대신 볼리바르를 찬미하던 스페인인(人)의 초대를 받아들여 산타마르타 근처에 있는 그의 영지를 여행했다.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그는 스페인 사람의 집에서 삶을 마쳤다. 그때가 1830년말이었고 사인은 결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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