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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레는 반란을 선동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보니파시오가 필리프의 파문을 공포하는 새로운 칙서를 발표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뒤 시아라 콜론나(유력한 콜론나 가문의 야심에 찬 인물)의 지지를 받고 몇몇 추기경들의 묵인하에 아냐니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는 교황을 체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냐니 시 지도자들과 즉시 공모하여 교황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틀 뒤에 이들은 생각을 바꾸어 교황을 구출했고, 따라서 노가레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만일 노가레가 교황을 공의회 앞에 끌고나가고 싶어하지 않았더라면 시아라 콜론나는 보니파시오를 죽였을 것이다. 아무튼 체포되어 있었던 2일 동안 교황은 신체적으로 모진 학대를 당한 듯하다. 그는 큰 용기와 인내로 모든 것을 참아냈고, 심신이 쇠약해진 채 로마로 돌아와 얼마 후에 죽었다.
보니파시오는 재위기간 동안 〈교회법 대전〉 가운데 〈제6장〉을 발행했으며 1300년을 희년으로 선포했다. 조토는 그림을 그려 이 희년을 기념했는데, 그림의 일부가 지금도 라테라노에 있는 산조반니 바실리카에 남아 있다. 보니파시오의 무덤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만들었으며, 기대어 서 있는 그의 모습을 새긴 석관이 바티칸 지하동굴에 남아 있다.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여 세운 많은 동상 가운데(그의 정적들은 이 동상들을 가리켜 그를 우상숭배자라고 비난했음) 여러 개가 남아 있다.
보니파시오가 교황의 티아라(교황관)를 더 높이고 그것을 두르는 관의 숫자도 1개에서 2개 혹은 3개까지(오늘날에는 3개를 두룬 삼중관이 쓰임) 늘렸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으며, 이것은 다른 자료들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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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보니파시오 8세의 말기생애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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