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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5. 5. 21, 코르시카 아작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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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40. 6. 29, 이탈리아 비테르보 |
국적 | 프랑스 |
요약 나폴레옹의 동생으로, 생클루에서 열린 '오백인회' 의장으로서 브뤼메르(안개의 달) 19일(1799. 11. 10)에 나폴레옹을 통령으로 선출하는 주역을 맡았다. 프랑스에서 교육받았고 1789년 코르시카로 돌아와 아작시오에서 자코뱅당을 대변했다. 1798년에는 코르시카 대표로 오백인회에 들어갔다. 그는 브뤼메르 18~19일(1799. 11. 9~10) 오백인회 의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 때 정국을 자기 형에게 유리하게 전환시켰다. 뤼시앵의 생애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던 이 쿠데타는 그가 열렬히 지지했던 민주주의의 대의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이후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1815년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을 돕겠다고 제안하고 파리에서 그의 편을 들었으며 나폴레옹의 2번째 폐위 때 최후까지 그의 왕권을 옹호했다. 뤼시앵은 이탈리아에서 여생을 보냈다.
생클루에서 열린 '오백인회'(五百人會) 의장으로서 브뤼메르(안개의 달) 19일(1799. 11. 10)에 나폴레옹을 통령(統領)으로 선출하는 주역을 맡았다.
프랑스에서 교육받았고 1789년 코르시카로 돌아와 아작시오에서 자코뱅당을 솔직하게 대변했다.
형제들에게 코르시카의 애국자 파스콸레 파올리와 결별하라고 요구하고 코르시카 대표단을 이끌고 프랑스로 건너가 파올리를 탄핵하고 그와 맞서는 데 지원이 필요하다고 간청했다. 그는 남부 프랑스에서 자코뱅당의 편에 서서 열심히 활동했다. 1794년 7월 테르미도르(熱의 달) 쿠데타가 일어나자 어쩔 수 없이 생샤망에서 한직을 맡을 수밖에 없었으나 체포되어 투옥당했다. 나폴레옹은 그의 석방을 주선하고 독일 주둔 프랑스군 장교 자리를 찾아주었다.
그러나 뤼시앵이 군대를 싫어해 코르시카로 보내졌다. 1798년에는 코르시카 대표로 오백인회에 들어갔다. 그는 브뤼메르 18~19일(1799. 11. 9~10) 오백인회 의장을 맡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나폴레옹은 생클루 궁전에서 이 의회를 전복시켰다. 뤼시앵은 의회의 대다수가 불법행동 금지안을 요구했기 때문에 투표에 회부하지 않은 채 때맞춰 폐회를 선언한 뒤 회의장 바깥에서 대기중이던 병사들에게 '단검의 대변자들'을 해산시키도록 호소하여 정국을 자기 형에게 유리하게 전환시켰다(브뤼메르 쿠데타).
뤼시앵의 생애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던 이 쿠데타는 그가 열렬히 지지했던 민주주의의 대의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큰형 조제프에게 보냈던 옛날 편지에서 그는 나폴레옹이 '완전히 자기중심적이지는 않지만 공공의 행복을 향한 열정을 뛰어넘는 야망'을 지녔다고 꿰뚫어보고 '반혁명이 일어날 경우 그는 사태의 막바지에 편승하려 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의심이 확실한 느낌으로 바뀜에 따라 통령정치시대(1799~1804)에 뤼시앵과 나폴레옹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갔다. 그는 나폴레옹의 끝없는 권력욕이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무장관 직책을 맡았으나 이내 제1통령 나폴레옹과 정치관, 성격이 달라 밀려났다. 1800년에는 마드리드 궁정의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그곳에서도 냉대를 받았다. 그는 파리로 돌아와 다시 나폴레옹의 음모에 반기를 들었다. 나폴레옹의 반대를 무릅쓰고 뤼시앵이 비밀리에 마담 주베르투(알렉산드린 드 블레샹)와 결혼했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하게 결렬되었다.
나폴레옹은 뤼시앵의 첫번째 부인인 크리스틴 부아예가 1800년에 죽자 뤼시앵이 에트루리아의 왕 루이지의 미망인인 스페인 왕녀 마리아 루이사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프랑스를 떠나도록 명령받은 뤼시앵은 이탈리아로 가서 살았다.
1807년 12월 나폴레옹은 타협을 모색하기 위해 만약 뤼시앙이 결혼을 무효로 하는 데 동의한다면 프랑스의 공(公)으로 삼겠다고 제안했다. 뤼시앵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해상에서 영국군에 체포되어 영국으로 압송되었고, 가벼운 감시를 받으며 살다가 1814년 로마로 돌아갔다.
그는 1815년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을 돕겠다고 제안하고 파리에서 그의 편을 들었으며 나폴레옹의 2번째 폐위 때 최후까지 그의 왕권을 옹호했다. 뤼시앵은 이탈리아에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서사시 〈샤를마뉴 또는 구원받은 교회 Charlemagne ou L'Église délivrée〉(1814)와 〈백일천하의 진상 La Vérité sur les Cent-Jours〉(1835), 첫 권만 나온 〈회고록 Mémoires〉(183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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