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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고 베스푸치

다른 표기 언어 Amerigo Vespucci
요약 테이블
출생 1454, 이탈리아 피렌체
사망 1512, 스페인 세비야
국적 이탈리아

요약 15~16세기 이탈리아의 상인·탐험가·항해가. 신대륙 탐험에 참여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1497~98년의 첫 번째 항해에 이어 두 번째 항해 때에는 아마존 강 하구를 탐험했으며, 산토아고스틴오까지 도달했다. 1500년 말경부터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1502년 1월 탐험대는 리우데자네이루 만을 목격했고 확실히 리오데라플라타까지 항해했다. 이때의 항해로 새롭게 발견된 땅이 '신대륙'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베스푸치는 포르투갈의 지원으로 1503~04년 또 다른 항해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부정확하다.

개요

15~16세기 이탈리아의 탐험가. 신대륙 초기 탐험(1499~1500, 1501~02)에 참가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에서 현재 아메리카 대륙의 지명이 유래되었다.

초기 생애

공증인 나스타조의 아들로 태어난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어릴 때 그의 삼촌인 조르지오 안토니오로부터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1479년 이탈리아의 유명한 가문 메디치가(家)와 관계를 맺고 메디치가의 대변인이 되어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조반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의 은행에 들어가 고용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1491년 말엽 베스푸치는 세비야에 파견되었다. 당시 세비야에는 메디치 가문이 운영하는 사업이 있었으며, 그 사업은 배를 의장(艤裝)하는 일을 맡은 지아노토 베라르디라는 사람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콜럼버스의 첫번째 항해의 귀환식에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베스푸치는 콜럼버스의 첫번째 항해에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진 베라르디와 함께 콜럼버스의 2번째 항해와 3번째 항해에 사용될 배의 건조를 도왔고, 이 일을 하면서 베스푸치와 콜럼버스는 인간적인 친분을 쌓았다. 1495년말(또는 1496초) 베라르디가 사망하자, 베스푸치가 세비야의 대행회사를 관리하게 되었다.

1497~1504년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직접 항해를 했다. 1505년 초반경 스페인 왕실의 개인자문가로 발탁되었으며, 2년 전에 세비야에 세워진 유명한 콘트라타시온에서 일하게 되었다. 1508년 그 회사는 아메리고 베스푸치를 수석항해사로 임명했는데 수석항해사는 항해에 필요한 수로안내인과 선장들의 자격을 심사하기도 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또한 베스푸치는 선장들이 반드시 제출하게 되어 있는 각종 자료들의 해석과 편집을 하면서 새로 발견된 지역에 대한 공식적인 지도제작과 그곳에 대한 항해로를 작성했다. 스페인 시민권을 받은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죽을 때까지 수석항해사로 일했는데 베스푸치의 공로가 인정됨에 따라 그의 미망인 마리아 케레초는 연금을 받았다.

항해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항해에 관한 기록으로 2개의 문서가 남아 있다. 첫번째 문서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1504년 9월 4일부터 리스본에서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공화국 장관이었던 피에로 소데리니에게 보낸 공식서한들이다. 이것은 이탈리아어로 씌어졌으며, 1505년 피렌체에서 인쇄되었다. 그리고 〈4회의 아메리카 항해 Quattuor Americi navigationes〉와 〈문두스 노부스 Mundus Novus〉 또는 〈에피스톨라 알베리키 데 노보 문도 Epistola Alberici de Novo Mundo〉라는 제목하의 라틴어 번역판 2권이 출판되었다.

두 번째 문서는 메디치가로 보낸 3편의 개인편지들이다. 첫번째 문서들에서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네 번의 항해가 언급되어 있으나, 두 번째 문서들에는 단지 두 번의 항해만이 기록되어 있다. 1930년대까지는 첫 번째 문서들이 베스푸치가 행한 4회의 항해순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알베르토 마그나기의 이론에 따라 이 문서들은 교묘하게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인 편지들이기 때문에 확인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항해는 2번으로 줄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베스푸치의 공적을 평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으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아직까지도 2개의 문서들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항해중에 알론소 데 오헤다의 지휘하에 스페인에서 출발한 4척의 탐험선에 항해사로 승선한 것으로 알려진 1499년 5월과 1500년 6월 사이의 항해는 신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항해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항해기록에 의하면 2번째의 항해에 해당된다. 베스푸치가 항해사로 참가했기 때문에 그는 분명 무경험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직 많은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베스푸치가 1497~98년의 첫번째 항해에서 동일한 지역, 즉 멕시코 만 연안과 플로리다에서 체서피크 만에 이르는 대서양 연안을 탐험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499~1500년의 항해에서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지금의 가이아나 해안에 오헤다를 남겨두고 항해를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남쪽으로 항로를 바꾼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아마존 강 하구를 탐험했으며, 남위 6° 정도의 카보데라콘소라시온 또는 산토아고스틴오까지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귀환하는 길에 트리니다드에 도착한 베스푸치는 오리노코 강 하구를 발견한 뒤 하이티를 향해 항해했다. 베스푸치는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카티가라 시장(市場)이 있다고 믿었던 아시아의 극동반도 지역을 항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반도의 끝을 카티가라 곶으로 명명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배가 이 지점을 지나면 아시아 남부의 바다로 접어든다고 생각했다.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즉시 인도양, 갠지스 만(지금의 벵골 만), 타프로바네 섬 또는 실론 섬(지금의 스리랑카)을 경유하는 새로운 탐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가 베스푸치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1500년말경부터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지원하에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1501년 5월 13일 리스본을 출발해서 그의 2번째 항해를 마쳤다.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잠시 머문 탐험대는 남서쪽으로 계속 항해하여 카보데산토아고스틴오 쪽의 브라질 해안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1502년 1월 탐험대는 바이아데구아나바라(지금의 리우데자네이루 만)를 목격했고 리오데라플라타까지 항해한 것이 확실시되어,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유럽인 중 처음으로 이곳을 발견한 사람이 되었다. 모든 가능성에 비추어볼 때, 함대는 파타고니아 해안을 따라 굴포데산훌리안 또는 그 너머까지 빠른 속도로 항해한 것으로 보인다.

신대륙의 발견

귀환로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함대는 1502년 7월 22일 리스본에 도착했다. 이 항해로 아메리고 베스푸치뿐만 아니라 당시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새롭게 발견된 땅이 아시아의 일부가 아니라 '신대륙'임을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지리발견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1507년 인문학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는 로렌의 생디에에서 〈4회의 아메리카 항해〉를 재발간했다.

그는 이 책에 앞서 자신이 제목을 붙인 〈천지학 입문 Cosmographiae introductio〉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했으며, 새롭게 발견된 땅의 지명을 "발견자 아메리고로 부터…… 이것은 마치 아메리쿠스 또는 아메리카의 땅인 것처럼"(ab Americo Inventore …… quasi Americi terram sive Americam)이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지명사용은 남아메리카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후 아메리카라는 지명이 발트제뮐러의 큰 평면천구도에 최초로 새겨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라는 지명이 지금의 북아메리카에 적용된 것은 후의 일이다. 평면천구도의 상부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묘사한 구대륙의 영역이 표시되어 있으며, 신대륙의 영역에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남긴 지역의 내용이 그려져 있다.

말년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아 1503~04년 곤잘루 코에유의 지휘하에 또다른 항해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실여부를 막론하고 이 탐험은 새로운 지식을 전혀 제공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는 베스푸치가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다른 탐험을 준비하는 수석항해사가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후로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탐험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고, 세비야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어떤 학자들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다른 사람들의 이권을 빼앗는 무례한 강탈자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스페인 정부가 외국인인 베스푸치를 수석항해사로 임명할 정도로 신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았을 때 근거가 없는 것이다. 스페인인들은 베스푸치가 해양과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기밀에 해당하는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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