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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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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1. 3. 9, 잉글랜드 서머싯 윈즈퍼드
사망 1951. 4. 14,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노동조합주의자·정치가.

20세기 전반에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노동 및 징병 장관과 외무장관을 지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나 11세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브리스틀에서 탄산수배달회사의 정식 직원으로 고용되었다. 1905년 브리스틀 노동권위원회의 무보수 서기가 되었고, 1910년에는 브리스틀 부두노동조합의 마부 지부를 결성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그는 노동조합 부서기장으로 활약하고 있었지만, 그 직책이 정식으로 만들어진 것은 1920년 5월이었다.

1921년에 그는 몇 개의 노동조합을 통합해 운수일반노동자조합을 결성하고, 1940년까지 이 노동조합의 서기장을 맡아 세계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으로 발전시켰다. 1925년부터 그는 노동조합회의(TUC)의 전체평의회 의원이었고, 1937년에는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26년 5월 3~12일에 계속된 영국 총파업을 주도한 주요인물이었으며, 파업을 해결하는 일에도 이바지했다.

대공황시대 초기에 그는 림지 맥도널드의 제2차 노동당 내각(1929~31)이 실업을 구제하기 위해 근본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며, 맥도널드의 거국 연립내각(1931~35)을 지지하지 않았다. 1930년대에 그는 점점 커지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위협에 대항하는 확고한 외교정책과 영국의 재무장을 지지했다. 1940년 5월 윈스턴 처칠이 전시 연립내각을 구성했을 때, 베빈은 노동 및 징병 장관에 임명되어 전시내각에 참여했다.

클레멘트 애틀리는 1945년 7월 26일에 노동당 내각을 구성하면서 베빈을 외무장관으로 기용했다. 베빈은 소련에 대한 낙관론을 버리고, 소련의 후원으로 발칸반도에 새로 세워진 정부들을 승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1945. 가을). 그당시 냉전의 주요무대였던 서유럽의 경제부흥과 방위체제 재건을 촉진하기 위해 그는 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 및 룩셈부르크와 브뤼셀 조약(1948. 3. 17)으로 동맹관계를 확립하고 유럽 경제협력기구(1948. 4. 16)를 창설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러한 협정에 뒤이어 미국 워싱턴 D. C.에서 북대서양조약(1949. 4. 4)이 조인되었다.

그가 마련한 유대인과 아랍인의 연방국가 수립계획이나 또다른 팔레스타인 분할계획(1947~48)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충돌로 빛을 보지 못했다. 1950년 1월 6일 영국은 미국의 정책과는 반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베빈은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경제개발을 위한 콜롬보 계획(1951. 6. 30 시행)을 제안했다. 건강 때문에 70번째 생일에 사임한 뒤, 생애의 마지막 5주 동안 그는 왕새상서를 지냈다.

그에 관한 전기로는 프랜시스 윌리엄스가 쓴 〈어니스트 베빈 Ernest Bevin〉(1952)과 앨런 불럭에 의해 씌어진 3권의 〈어니스트 베빈의 생애와 시대 The Life and Times of Ernest Bevin〉(1권 1960, 2권 1967, 3권 198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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