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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리오즈의 초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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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리오즈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 알프스 지역의 그르노블에서 북서쪽으로 약 56km 떨어진 곳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학교는 엉망이었으나 베를리오즈는 교양을 갖춘 계몽된 의사였던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았는데 아버지는 그에게 라틴어뿐만 아니라 음악도 가르쳤다. 그러나 다른 많은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베를리오즈는 어린시절에 정규적인 음악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스스로 화성법을 공부하고 12세 때 지방 실내악단을 위한 곡을 작곡했다. 연주자들의 도움으로 플루트와 기타를 배웠으며 기타 연주는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1821년 그의 아버지는 의학을 공부시키려고 그를 파리로 보냈고 그는 1년 동안 첫번째 학위를 얻을 수 있도록 교과 과정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는 기회만 생기면 파리 오페라단의 공연을 보러 갔으며, 그곳에서 손으로 악보를 베끼면서 전체 레퍼토리를 공부했고 특히 글루크의 작품에 깊이 매료되었다. 마음속에 음악에 대한 소명의식이 분명히 자리잡게 되자 파리 음악원 작곡교수였던 장 프랑수아 르쉬에르의 제자가 되었다. 이 일로 베를리오즈는 그의 인생에서 거의 8년 동안 그를 괴롭혔던 부모와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는 끝내 의지를 굽히지 않고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1830년 마침내 로마 대상을 받았으며 그 이전 대회에서는 2등상을 받았다. 이러한 성공으로 가족과의 관계는 회복되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음악 경력에서 이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다. 같은 해 그의 첫번째 대작이자 19세기의 신기원을 이룩한 작품인 〈환상 교향곡〉을 작곡하여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성공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고 로마 대상의 특전으로 부여된 2년 동안의 이탈리아 체재를 포함한 3년간의 외국생활은 어떤 측면에서는 그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파리에서 오랜 견습 기간에 그는 베토벤과 베버, 그리고 위대한 두 시인 셰익스피어와 괴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그는 파리를 떠들썩하게 했던 셰익스피어 배우인 해리엇 스미드슨을 먼발치에서 사랑하게 되었고, 이 짝사랑의 열병에서 벗어난 후 그는 재능있고 아름다운 피아니스트인 마리 모크(후에 플레이엘 부인)와 약혼했다. 로마 대상의 의무 조항으로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면서 그는 약혼녀는 물론 창작력을 자극했던 예술적 환경까지 버려야 했다. 그는 결국 천재적 감각으로 근대 프랑스 음악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셈이 되었다.

대중은 17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파리 악파'에 만족해 있었고,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있는 빈을 포함한 모든 유럽 지역은 앙드레 그레트리, 에티엔 메윌, 루이지 케루비니 등이 작곡한 작품을 환영했다.

반면 베를리오즈는 베버와 베토벤의 작품들(마지막 현악 4중주를 포함한)을 내세우려 했고 자신의 작품이 그 대열에 합류하기를 원했다. 또한 그는 음악의 극적 표현을 위해 그가 잘 알고 있는 무대음악의 대가인 글루크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베를리오즈에게 있어 음악은 무엇보다 먼저 극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으며, 이들 세 음악가는 모두 일면 극작가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1823년 첫번째 음악 평론에 이미 이 강령이 나타나 있으며 초기의 이러한 예리하고 강렬한 시각은 완숙기에 가서도 예술적 근원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지적이고 직관적인 시각의 바탕을 이해하려면 그의 정력적인 활동이 추구하는 바를 이해해야만 한다.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연주되게 하려는 자기 본위의 끊임없는 노력은 사실 엄청난 정력이 필요했다. 독일, 벨기에,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등지로의 잦은 여행의 결과로 그는 유럽 굴지의 관현악단에 새로운 양식을 전파했으며, 반대로 그들을 통하여 젊은 작곡가와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는 비평가들에게 새로운 음악 어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전파 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에 베를리오즈는 이탈리아에서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회고록 Mémoires〉(1870)에서 〈환상 교향곡〉은 물론 오라토리오와 수많은 칸타타, 24편의 가곡과 2편의 서곡, 미사와 오페라의 일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Tempest〉에 붙인 환상곡, 괴테의 〈파우스트 Faust〉의 8장면의 음악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쏟아냈던 파리 시절 이후 얼마나 그가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냈는가에 대해 쓰고 있다.

그러나 심지어 이탈리아에서도 베를리오즈는 창작 노트를 채우고 러시아의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를 만났으며 멘델스존과는 평생의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기타를 어깨에 메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그에게 먹을 것을 나눠준 농부들과 유랑민들을 위해 연주를 했다. 이탈리아에서 받았던 인상은 〈트로이 사람들 Les Troyens〉과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 Béatrice et Bénédict〉(1862 초연) 등 마지막 작품에까지 음악적·극적 영감의 근원으로 작용했다.

그러는 동안 연애는 시들해졌고 로마의 메디치 저택에서의 생활을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18개월의 유랑생활 끝에 파리로 돌아왔으며 로마 대상의 나머지 특전은 박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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