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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19. 12. 28, 프랑스 디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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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87. 2. 13, 베르사유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외무장관.
미국독립전쟁 때 북아메리카 식민지 이주민들과 동맹을 맺고 그들이 영국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었으며 동시에 유럽에 안정된 세력 균형을 확립했다.
베르젠의 아버지는 디종 고등법원 원장이었다. 그는 1740년대에 외교관인 삼촌 테오도르 셰비냐르 드 샤비니와 함께 포르투갈과 독일 주재 대사관에서 근무했고, 1750년에 트리어(지금의 독일에 있음) 주재 대사가 되었다.
베르젠은 하노버 주재 대사관에서 근무한 뒤(1752), 1754년에 오스만-투르크 주재 대사가 되었다. 2년 뒤에 프랑스는 오랜 숙적이던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과 영국에 대항해 싸웠다(7년전쟁:1756~63). 이 전쟁 때 투르크 주재 대사인 베르젠은 오스트리아에 심한 적대감을 품고 있는 투르크인들에게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프랑스의 정책을 훌륭히 변호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본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투르크와 러시아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러시아와 투르크가 마침내 전쟁(1768~74)을 시작하자 그는 파리로 소환되었다.
1771년에 스웨덴 주재 대사로 임명된 베르젠은 구스타프 3세(1771~92 재위)의 쿠데타(1772. 8)에 협력했는데 구스타프는 이 쿠데타를 통해 스웨덴 귀족들을 억누르고 왕권을 크게 강화했다. 1774년 6월에 새로 프랑스 국왕이 된 루이 16세는 베르젠을 소환해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미국독립전쟁이 일어난 지 8개월 뒤인 1775년 12월 초 베르젠은 프랑스가 반란을 일으킨 아메리카 이주민들에게 은밀한 재정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영국에 타격을 주어 프랑스가 7년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것을 앙갚음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기대했다. 그러나 재무장관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는 그의 계획에 맹렬히 반대했다. 그런 원조는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이 튀르고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튀르고가 1776년 5월 실각할 무렵에 베르젠은 이미 국왕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1778년 2월 그는 식민지 주민들과 동맹을 맺었고 그후 프랑스는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 지원병과 프랑스 함대는 1781년에 식민지 주민들이 요크타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도록 도왔지만, 베르젠은 1783년 영국과 평화협상을 벌일 때 북아메리카에 갖고 있었던 프랑스의 옛 영토를 되찾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프랑스-미국 동맹). 한편 베르젠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관계를 오스트리아의 바이에른 진출에 대한 프랑스의 지지를 얻어내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으려고 애썼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요제프가 프로이센과 전쟁을 시작하자(바이에른 왕위 계승전쟁:1778~79), 베르젠은 평화협상 중재에 나섰다.
그는 또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바이에른을 맞바꾸고 스헬데 강을 오스트리아 선박에 개방하도록 네덜란드인에게 압력을 가하려는 요제프의 시도(1784~85)를 봉쇄했다. 베르젠은 죽기 몇 개월 전에 영국·러시아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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