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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440~80년경 재위했던 에와레 대왕이 서아프리카 지역을 통치하면서 영토를 넓히고 왕권을 확립했다. 왕은 최고의 정치적·사법적·경제적·정신적 국민 지도자가 되었고 종교의식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그의 뒤를 이은 강력한 왕들이 베닌을 고도로 조직화된 나라로 만들었으며 많은 장인들이 모여 조합을 이루어 왕국은 상아조각공과 나무조각공들로 유명해졌다. 15~18세기 상아·야자유·후추를 포르투갈 및 네덜란드의 상인들과 활발하게 거래했으며 이들과 서아프리카의 내륙 부족들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또 노예 무역으로 엄청난 이익을 올리기도 했다. 18~19세기 초기 왕위계승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 왕권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1897년 영국이 베닌시티를 불태운 뒤 쇠퇴해 결국 영국령 나이지리아에 합쳐졌다.
13~19세기에 번영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에도족이 반미신적인 왕들의 왕조가 다스리는 것에 불만을 품고, 13세기에 이페의 왕자 오란미얀을 자신들의 통치자로 초청했다고 한다. 그뒤 여러 해 동안 세습 계급인 지역 족장들이 여전히 권력을 유지했지만 오란미얀의 아들 에웨카가 베닌의 첫 오바(oba), 즉 왕인 것으로 여겨진다.
에웨도 왕이 다스리던 13세기말에 비로소 왕권이 주장되기 시작했으며 위대한 전사이자 마술사라는 평가를 받는 가장 유명한 왕 에와레 대왕(1440경~80 재위) 때 확고한 왕권이 수립되었다.
에와레 대왕은 왕위의 세습제를 확립했고 영토를 넓혀 16세기 중엽에는 베닌 왕국의 영토를 동쪽의 나이저 강 삼각주에서 서쪽으로 오늘날의 라고스까지 이르게 했다. 라고스는 베닌 군대가 세운 곳으로 19세기말까지 베닌 왕에게 공물을 계속 바쳤다. 에와레는 수도(지금의 베닌시티)를 재건하면서 거기에 거대한 벽과 호(濠)를 만들었다.
왕은 최고의 정치적·사법적·경제적·정신적 국민 지도자가 되었고 왕과 왕의 선조들은 결국 국가적 숭배 대상이 되었으며 종교의식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에와레의 뒤를 이어 강력한 왕들이 잇따라 왕위를 계승했다. 그 가운데 주요인물로는 에와레의 아들인 '정복자' 오졸루아(1481경~1504경)와 오졸루아의 아들 에시기에(16세기 초기부터 중엽)를 들 수 있다. 이들은 포르투갈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누렸고 포르투갈 왕에게 대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강력한 왕들이 다스리는 동안 베닌은 고도로 조직된 나라가 되었다. 많은 장인들이 모여 조합을 이루었고 왕국은 상아조각공과 나무조각공들로 유명해졌다. 놋쇠세공인들과 청동주물공들은 사실적으로 묘사한 머리조각, 얕은돋을새김, 그밖의 다른 조각품들을 만드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15~18세기에 베닌은 상아·야자유·후추를 포르투갈 및 네덜란드의 상인들과 활발히 거래했으며 이들과 서아프리카의 내륙 부족들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노예 무역으로 엄청난 이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와 19세기 초기에 왕국은 왕위계승을 놓고 왕족들 사이에 치열한 싸움을 벌임으로써 약해졌는데 이러한 싸움이 내전으로까지 번진 경우도 있었다.
힘이 약한 왕들은 궁전에 숨어 살면서 신성한 왕권을 나타내는 종교의식에서 위안을 얻는 한편 늘어나는 비생산적인 귀족계급에게 마구잡이로 귀족 칭호를 주었다. 번영하던 왕국은 노예 무역이 금지되면서 쇠퇴했고 베닌의 지도자들은 영토가 침식당하는 것을 막는 방도로 점점 초자연적인 의식과 대규모의 인간 희생의식에 의존했다. 이 인간제물의 관행은 계속되다가 1897년에 영국이 베닌시티를 불태운 뒤에야 겨우 뿌리 뽑혔다.
베닌시티가 불에 탄 뒤 주민의 수가 크게 줄고 쇠퇴한 왕국은 영국령 나이지리아에 합쳐졌다. 베닌을 다스리던 왕족의 후손들이 아직도 베닌시티의 왕위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오늘날 왕은 정부에 대해 단지 자문 역할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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