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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백제의 불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다. 도가사상도 일찍이 전래되어 지배층 사이에 신선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낙랑·대방의 한인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4세기 중엽 〈서기〉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를 둘 정도로 국가적 차원에서 유교를 장려했다.
의자왕 때의 태자궁·망해정 등을 비롯해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 않고 익산의 미륵사지를 비롯한 절터와 석탑 등이 남아 있다. 부여의 정림사지5층석탑, 익산의 미륵사지석탑 등이 유명하다. 고분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와 공주·부여 일원에 많이 남아 있다.
백제는 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의 각국과 문화교류가 활발했다. 백제의 문화는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고대문화인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종교와 사상
불교는 384년(침류왕 1) 호승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그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 다음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다. 심지어 599년에는 국왕의 명으로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고,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불태운 적도 있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는데, 특히 600년에 착공해 634년에 완성된 왕흥사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백제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던 것이 특징인데, 겸익이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한편 도가사상도 일찍이 전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배층 사이에는 신선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던 듯하다. 산경문전이나 사택지적비에도 도교사상의 영향이 발견된다. 또 백제는 낙랑·대방의 한인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역사서인 〈서기 書記〉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를 둘 정도로 유교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했는데, 별도의 교육기관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축과 미술
동성왕 때의 임류각, 의자왕 때의 태자궁·망해정 등을 비롯해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 않고 익산의 미륵사지를 비롯한 절터와 석탑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부여의 정림사지5층석탑, 익산의 미륵사지석탑 등이 유명하다.
불교와 관련된 조각품으로 석불과 금동불, 납석제 불상 등이 현존한다. 고분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와 공주·부여 일원에 많이 있는데,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후기에는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축분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양(梁)과의 활발한 교류를 반영하는 국제적으로 세련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국제적인 문화교류
백제는 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의 각국과 활발하게 문화를 교류했다. 양나라에는 사신을 보내어 열반 등의 경의와 모시박사·공장·화사를 청하는 등 문화수용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백제의 사상과 문화는 이웃 왜에 전파되어 그들의 고대문화를 꽃피우는 데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일본사).
일찍이 한성시대에 아직기·왕인 등이 왜에 한학과 유교를 전했는데, 특히 왕인은 〈천자문〉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오경박사가 교대로 왜국에 파견되었으며 기술자인 봉녀·야공·양주인을 비롯해 와박사·조사공 등의 건축기술자도 파견되었다. 백제문화는 일본 고대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아스카[飛鳥] 문화를 꽃피우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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