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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전 전투사령부

다른 표기 언어 白野戰戰鬪司令部

요약 6·25전쟁중 1951년 11월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토벌을 위해 조직된 전투사령부.

사령관이었던 백선엽의 성을 따 붙여졌다. 미8군의 작전명령에 따라 'Task force Paik'으로 명명된 이 부대는 '쥐잡이 작전'으로 불리는 토벌작전을 총괄했다. 당시 지리산 일대에는 6·25전쟁 이전의 빨치산과 북으로 넘어가지 못한 인민군으로 구성된 남부군 세력이 상당히 강했다.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당시 제1군단장이었던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하여 전방에서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 준장)과 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의 2개 사단이 지리산 일대에 차출·투입되었다.

사령부는 전라북도 남원에 설치되었으며, 약 200명의 장교와 하사관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경찰부대의 지원을 위해 치안국 요원이 파견되었고, 작전연락·통신·심리전을 위해 60여 명의 미 군사고문단이 합류했다. 주요방침은 작전지역을 몇 개 지역으로 구분하여 먼저 지리산 지역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여 철저히 소탕한 다음 순차적으로 타지역을 소탕한다는 것이었다.

수도사단은 해상기동으로 전라남도 여수에 상륙하여 남에서 북으로, 8사단은 육로로 북에서 남으로 각각 지리산을 포위·공격하며 '타격부대'의 역할을 맡았고, 기존 남서지구 전투사령부(준장 김용배)의 경비연대와 각종 경찰부대는 '저원부대'로서 목표지역의 외곽, 특히 빨치산의 통로 및 도주로를 차단하여 분산 도주하는 빨치산을 섬멸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한국 공군의 무스탕 전투기 편대는 인근 사천비행장에서 지상작전을 지원했다.

제1기 작전은 1951년 12월 2일부터 일련의 포위망을 형성하여 조금씩 압축해 들어가는 방법으로 지리산 정상까지 1주일 내에 진격했고, 그뒤에는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는 빨치산을 추격했다. 제2기 작전은 12월 19일부터 1952년 1월 6일까지 지리산 외곽의 거점을 소탕했는데, 전주-순천을 잇는 남북선을 중심으로 서쪽은 8사단, 동쪽은 수도사단이 담당했다. 제3기 작전은 1월 15일부터 개시되어 재차 지리산을 포위·공격했는데, 토벌작전이 사실상 마감된 1월말까지 주로 수색·추격·매복 작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토벌의 결과 1만 9,000명 이상의 빨치산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이 작전으로 말미암아 남부군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 세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고,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여 주력을 분산시킨다는 북한의 전략방침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토벌작전 직후 새로이 탄생한 국군 제2군단의 모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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