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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후기 이래 상품경제의 발전과 함께 지주의 소작미, 부농의 잉여생산물 등이 상품화되면서 지주나 부농, 또는 이들의 곡물을 매입하거나 판매를 위탁받은 곡물상인들은 대규모 곡물수요가 있는 서울을 비롯한 도시나, 흉작 등으로 곡물이 부족한 지방에 곡물을 운송해 상업상의 이익을 취했다. 이들의 곡물유출은 유출지역 내 곡물가격의 등귀현상을 유발해 해당지역 지방관은 관할지역 내의 수요곡물을 확보하고 곡가 안정을 꾀하는 수단으로 방곡을 실시했다. 그러나 원래 지방관의 방곡실시가 기존의 법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것인데다가 각 지역의 방곡이 심해질 경우 정치의 중심지인 서울의 곡가 안정을 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방곡이 실시될 때마다 이를 금지했다.
조선 후기 이래 상품경제의 발전과 함께 지주의 소작미나 부농의 잉여생산물 등이 상품화하면서 지주나 부농, 또는 이들의 곡물을 매입하거나 판매를 위탁받은 곡물상인들은 대규모 곡물수요가 있는 서울을 비롯한 도시나, 흉작 등으로 곡물이 부족한 지방에 곡물을 운송해 상업상의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 이들의 곡물유출은 유출지역 내 곡물가격의 등귀현상을 유발해 해당지역 지방관은 관할지역 내의 수요곡물을 확보하고 곡가 안정을 꾀하는 수단으로 방곡을 실시했다.
그러나 원래 지방관의 방곡실시가 기존의 법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것인데다가 각 지역의 방곡이 심해질 경우 정치의 중심지인 서울의 곡가 안정을 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방곡이 실시될 때마다 이를 금지하고 있었다.
1876년 개항 이후에도 이같은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개항 초기 중앙정부는 방곡을 금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일본으로의 곡물유출이 증가됨에 따라 종래의 국내 곡물유통과는 다른 조건이 형성되었으며, 지방관의 방곡은 대일유출(對日流出)의 저지와도 긴밀히 관련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도 방곡은 여전히 법제적 명령으로서의 근거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1876년 체결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에는 곡물의 수출입을 허용하는 규정이 있어, 1883년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이 체결되기 이전에는 대일유출을 저지할 조약상의 명분이 없었다. 1883년에 이르러 국외로의 유출방지를 목적으로 1개월 전의 사전통보 후 방곡령을 시행할 수 있다는 조문이 마련됨으로써 제한적이나마 제도적 장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역시 일본측 주장에 따라 중앙정부의 명령에 의해 지방관이 시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되어, 지방관이 독자적으로 실시하는 법제적 근거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의 체결 이후 방곡시행 때마다 지방관들은 이에 근거해 방곡령을 발포했기 때문에 이 이후의 방곡행위는 방곡령이라는 행정명령의 시행으로 볼 수 있다.
방곡령 실시 시기
개요
방곡령은 1876년 개항 이후 1904년까지 100건 이상 발령되었다.
실시 원인은 외압(外壓)에 의한 곡물유통구조의 변동과 관련되어 있으며 대개 3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1876~84년
이 시기의 방곡은 14건 이상이 발생했는데, 종래와 같은 국내곡물수급 구조 내에서 발생한 경우와 대일유출을 저지하기 위해 나타난 경우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일본상인은 개항장 밖에서 행상할 수 없었으며 곡물수출도 일본과의 전체 무역량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전자가 보다 우세했다. 전자의 구체적 목적은 상인이 곡물을 매점하는 도매행위를 막는 데 있었으며, 후자는 밀무역(密貿易)을 막으려는 것과 세곡(稅穀)이 개항장으로 부정유출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역적으로도 중앙정부가 방곡시행을 금지한 곳은 서울 중심의 유통권과 관련된 지역이었으며, 주로 대일유출과 관련해 나타난 지방은 이 시기 곡물수출의 중심지인 부산항의 배후지인 경상도였다.
1885~94년
이 시기에는 외국상인의 개항장 밖에서의 행상이 가능해지면서 일본상인에 의한 대량의 곡물유출이 이루어졌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방곡령이 급증해 적어도 75건 이상이 발생했다.
실시 원인으로는 첫째, 곡물의 국외유출을 막기 위한 중앙정부의 전국적 방곡령이 1건 있었고, 둘째, 대외무역의 증가로 개항장 중심의 새로운 유통권이 형성되면서 서울 중심의 곡물유통권이 위협받게 되자 이를 보호하기 위해 실시한 것, 셋째, 일본상인의 행상 증가로 조선상인의 상권이 침해받게 되자 이를 보호하기 위해 실시한 것, 넷째, 지방관이 중앙정부에 납부할 세곡의 확보를 위해 실시한 것, 다섯째, 지방관이 일본상인에 대해 상업세를 징수하기 위해 실시한 것, 여섯째, 지방관이 방곡령을 실시한 후 곡물을 매집(買集)하고 방곡 전후의 곡가 차이를 이용하여 폭리를 꾀하기 위해 실시한것, 일곱째, 일본상인의 곡물매집으로 관할지역 내의 곡가가 등귀하여 대중적 저항이 야기됨으로써 지방관이 이를 막기 위해 실시한 것 등이 있다.
1890년까지는 경상도가 발생건수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1891년 이후에는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에서 가장 빈번히 시행되었다. 이같은 경향은 종래 부산항을 중심으로 곡물을 구입하던 일본상인들이 행상의 증가와 함께 서울 중심의 유통권까지 깊이 침투한 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1889, 1890년에 황해도와 함경도에서 실시된 방곡령이 일본과 극심한 외교적 마찰을 일으켜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자 중앙정부는 이후 지방관의 독자적 방곡령에 대해 엄금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1895~1904년
이 시기에는 일본상인들이 곡물 교역시 조선상인에게 자금을 선대(先貸)하거나 입도선매(立稻先買)로 농민의 생산과정까지 침투하고 있었으며, 직접 토지를 구입해 생산과정에 개입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곡물유출이 대일 총수출액의 80% 이상을 차지했지만 방곡령의 발생건수는 전(前) 시기보다 줄어들어 14건 정도에 불과했다. 그 원인은 함경도와 황해도 방곡령사건의 배상문제로 곤란을 겪은 데다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압력이 강화되면서 방곡령사건으로 인한 배상문제를 지방관에게 책임지우는 등 지방관이 임의로 실시하는 방곡을 중앙정부가 적극적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곡물을 구입해 생계를 잇던 도시 빈민이나 빈농층을 중심으로 방곡령실시요구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지방관이나 정부가 실제로 실시한 사례는 적었고, 실시되었다 하더라도 일본의 외교적 압력 때문에 중앙정부는 이의 철폐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도 흉작으로 인한 중앙정부의 방곡령이 1건 있었고, 정부의 반대입장에도 불구하고 지방관이나 암행어사에 의해 일본상인을 대상으로 지역적 곡물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방곡령이 몇 차례 실시되었다.
그리고 갑오개혁의 조세금납화(租稅金納化) 조치 이후 지방관들이 상납금을 전용해 곡물을 개항장 등지로 운반하고 상업상의 이익을 취하는 과정에서, 싼값에 곡물을 구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관할지역 내 농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례도 많았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관권에 의한 방곡령 실시가 어려워지자 정부는 곡물유출에 대한 아무런 대응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대량의 곡물공급지로 전락해가고 말았다.
요컨대 개항 이후의 방곡령은 중앙정부가 외압으로 국내 시장권을 보호하지 못한 가운데 지방관이 곡물을 구매하여 생계를 잇는 대중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곡물의 유통과정에 침투한 일본상인들로부터 지역적 곡물시장을 보호하려는 데 실시의 근본목적이 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방곡령의 소멸은 일본자본주의가 이미 국내의 곡물유통을 본격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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