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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4, 미얀마 아마라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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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8. 10. 1, 만달레이 |
국적 | 미얀마 |
요약 미얀마의 왕(1853~78 재위).
그의 재위시기는 식민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기 전 개혁과 문화가 꽃 핀 시기로 알려져 있다. 민돈은 1852년의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 동안 통치했던 파간(1846~53 재위)의 형제로서, 왕이 되자마자 화해할 것을 제기하여 영국이 전쟁 동안 점령한 페구(미얀마 남부)의 지위에 관해 영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민돈 왕은 영국 사람들을 설득해 페구를 돌려받으려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되었으며 해안지역 및 티크 나무와 쌀 재배가 풍부한 지역 일부를 빼앗긴, 더욱 줄어든 영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이상의 곤란을 피하기 위해 1867년 무역협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영국이 점령하지 않은 미얀마 영역에서 영국에게 큰 경제적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1872년 민돈은 총리 킨운 밍이 우 가웅에게 외교임무를 맡겨 런던·파리·로마로 보냈으며 독립국가로서 미얀마의 지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잃어버린 영토의 회복을 호소하도록 했다.
민돈의 통치시기는 미얀마의 문화와 종교 생활에서 황금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1857년 민돈은 만달레이에 새 수도를 건설해 전통적 미얀마 건축의 걸작인 궁전과 사원들을 지었다. 왕은 또한 팔리어(語) 경전을 개정하고 정확히 하기 위해 1871년 만달레이에서 5차 결집(結集:불교회의)을 개최했으며 만달레이를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보수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돈은 많은 개혁을 추진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정(査定) 토지세인 타타메다와 공무원의 고정급여였다. 그는 도량형을 통일하고 도로와 전신체계를 만들었으며 미얀마의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화폐를 주조했다. 민돈 왕의 통치는 시암(타이)의 몽꿋 왕의 통치와 비교될 만한데, 독립 미얀마 왕국의 존속은 영국의 이익에 방해가 된 반면 시암은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 사이의 완충 국가로서 특수 지위를 누렸다. 아들 티바우(1878~85 재위)가 민돈의 뒤를 이었으나 그는 미얀마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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