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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4. 7. 19, 일본 에도[江戶:지금의 도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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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51. 3. 12, 에도 |
국적 | 일본 |
요약 일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12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요시[德川家慶:1837~53 재위]의 로주[老中:쇼군 직속으로 정무를 총괄하고 다이묘(大名)를 감독하던 직책].
덴포 개혁[天保改革]을 단행했는데 이 개혁은 도쿠가와 바쿠후의 통치력을 약화시키고 있던 사회적·경제적 퇴보를 저지하고자 한 마지막 시도였다.
유력한 봉건 영주의 아들로 태어나 1828년부터 도쿠가와 바쿠후의 후계자 이에요시를 가르쳤다.
1834년 쇼군의 로주가 되었지만 3년 뒤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濟 : 1787~1837 재위]가 죽고 이에요시가 쇼군에 오르고 나서야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후 1843년 실각할 때까지 도쿠가와 정권을 실질적으로 통제했다. 그는 10년 가까이 흉년이 계속되어 민심이 흉흉해져 있을 무렵에 권력을 잡았는데, 이 시기는 중국이 아편전쟁(1839~42)에서 영국에 패배한 시점과 일치한다. 따라서 그는 만약 일본이 국내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서양의 침입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도쿠가와 시대 초기의 소박한 무사정신을 회복시키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개인이든 정부든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검약령(儉約令)을 내렸는데 이는 너무 극단적이어서 실행을 강요하기는 힘들었다. 또 상품경제의 가치를 하찮게 여긴 그는 상품경제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귀족계급이 중간계급에게 진 빚을 탕감해주었으며, 선임자들이 인가한 가부나카마[株仲間:상인조합]들을 해산시켰고, 도시로 이주해 정착한 농민들을 농촌으로 돌려보냈다. 특히 에도와 오사카[大阪] 부근에 있는 다이묘들의 토지를 바쿠후의 직할령으로 몰수하려 한 시도(아게치레이[上地令])는 커다란 반발을 샀다. 미즈노의 정책들이 일반의 호응을 잃게 되자 결국 이에요시에 의해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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