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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781경, 이라크 바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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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857, 바그다드 |
국적 | 이슬람 |
요약
유명한 이슬람교 수피(신비주의자)·신학자.
정식 이름은 Abū ⁽Abd Allāh alḤarith ibn Asad al- ⁽Anazī al-Muḥāsibī.
개요
독실한 신앙의 정신적 순화와 후기 이슬람 정통파 교의의 선구자 역할로 유명하다.
대표작은 〈알 리 아야 리 후쿠크 알라 ar-Ri ⁽āyah li-ḥūqūq Allah〉인데, 이 책에서 그는 금욕주의는 공덕으로서 가치있는 일이지만 그것은 항상 신에 대한 내적·외적 의무로 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수피즘).
무하시비의 생애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자 곧 바그다드로 이사했는데 이는 새 수도인 바그다드에 가면 돈을 벌 기회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아버지는 약간의 재산을 모았으나 무하시비는 교의적 견해차이 때문에 재산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정상적인 생활에 좋은 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화려한 옷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부르주아적 모습은 바스라에서 생긴 특성으로 인해 수정되었다. 즉 그의 출세간적(出世間的) 기풍은 유명한 수피 신학자인 알 하산 알 바스리(728 죽음)에게 전해받은 것이다.
이슬람 금욕주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발전했다. 밤에는 〈코란〉을 낭독하고, 음식의 종류와 양에 제한을 두었으며 특별한 모직옷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수사가 격리된 생활을 하는 반면 이슬람 금욕주의자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성원으로 살아야 했다.
철학과 가르침
그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도시생활에서는 밖으로 드러나는 금욕이 모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열정에서 생기는 일반적인 과오는 억제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위선이나 교만과 같은 내적인 악의 기만적인 수단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독실성이 어떤 사람의 인상이 되면 그것은 바로 숨겨진 자기중심적 생각의 보호막으로 작용할 수 있다. 죄를 짓는 행위는 흔히 객관적 죄 자체가 아니라 죄인의 주관적 태도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코란〉의 계율과 금기 영역 밖에는 단서없이 선이나 악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신적 마비를 초래할 수도 있어서 종잡을 수 없긴 하지만 가장 권할 만한 태도는 면밀함이다. 금욕주의는 어떤 가외의 공덕으로서 가치가 있지만 그는 그것은 항상 신을 향한 내적·외적 의무에 주의를 기울여 제어되어야 한다(무하시비의 대표작인 〈알 리아야 리 후쿠크 알라〉). 이를 위한 적절한 도구는 이성(理性)이며, 무하시비는 불합리와 정신적 도취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신비주의자의 일반관행을 뛰어넘어 이것을 극히 강조했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지속적인 자기 시험을 통해 최후의 심판을 예측하는 무하사바(muḥāsabah)였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신비체험을 방해한 것처럼 보인다. 이 심리적 방법에서 오는 냉정함으로 인해 많은 열등감이 생겨 몰아적 기쁨에 몰두하려는 모든 시도를 묻어버렸다.
무하시비는 자신의 사상을 대화체 교수법으로 가르치고 곧바로 그것을 기록하곤 했다.
그래서 그의 책들은 아직도 이러한 대화체로 보존되고 있다. 그가 특히 제자 주나이드를 통해 후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지만 그는 일생 동안 의심을 받았고, 만년에는 박해로 한층 고달픈 생활을 했다. 그는 아브드 알라 이븐 쿨라브(855 죽음)가 영도하는 신학자 단체에 가입해 당시 지배적인 합리적 무타질라파 교의를 비판했다. 그 논쟁의 초점은 신의 본질과 속성에 대한 문제였다(신학). 신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무타질라파는 그 속성을 단순한 명목상의 측면으로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무하시비는 각 속성의 가치를 견지하기 위해 더욱더 그 독립적 지위를 강조했다. 또 무타질라파는 신의 말씀이라는 속성은 창조된 것이며 〈코란〉의 말씀처럼 현세적 계시로 실현된다고 주장한 반면, 무하시비는 영원한 신의 말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코란〉의 말씀도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이 〈코란〉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일반인들의 믿음을 지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833년 칼리프 알 마문이 무타질라파를 편들어 시작된 종교재판에서 쓴 이 진부한 교리를 회피했던 것이다(타우히드).
뒤를 이은 칼리프 무타와킬은 850~851년 전임자의 친(親)무타질라 정책을 폐기하고 2년 뒤에는 합리주의 신학을 모두 금지했다.
따라서 이제 무하시비의 신학적 입장도 이전에 종교재판으로 희생된 사람들에게는 배반으로 보였는데, 그의 주장이 외견상 무타질라파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또 이 희생자들은 교의의 뒷받침과는 무관하게 합리주의 신학방법의 사용을 확실히 이단으로 간주했다. 그는 결국 대중강의를 포기해야만 했고 쿠파로 이주했다. 후에 자신의 신학적 확신을 포기하는 대가로 바그다드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배척은 계속되었고, 857년 무하시비가 바그다드에서 죽었을 때는 단 4명만이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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