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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50년대 중반 박인수가 여성을 농락한 사건.
6·25전쟁이 끝날 무렵에 이르러 한국인의 정신적 풍토에는 전쟁이 가져다준 상처와 더불어 심한 혼란이 초래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서구에서 풍미되다가 늦게 수입되었던 퇴폐와 향락의 소용돌이 등이 사회전반에 방종한 전후 풍조를 조성했다.
세인을 경악케 한 박인수 사건은 이같은 세태를 더욱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 박인수는 애인의 배반에 대한 복수심에서, 당시 한창 유행하고 있던 댄스를 미끼로 약 1년 동안 무려 70여 명의 여인을 농락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상대가 대부분 적어도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대학 재학중인, 지성을 갖추었고 당시 사회에서 선도적인 지위에 있다고 자부하던 여성들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그는 1955년 5월 31일 검거되어 7월 22일 언도공판에서 공무원 자격 사칭행위에 대해서만 벌금형을 받았고,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서는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재검방지를 위해 관찰보호에 붙여졌다. 법정에서 그는 자신이 상대한 70여 명의 여인 가운데 순결한 처녀는 단 한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고 털어놓음으로써 당시의 사회를 전율케 했다.
이 사건으로 "자기 스스로 보호하지 않는 순결은 법이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자유부인', '사모님' 등의 유행어가 속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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