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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다른 표기 언어 朴泳善
요약 테이블
직업 화가

요약 일본문전에서 여러 번 입선했고, 일제가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전쟁 분위기를 고취하기 위해 개최한 결전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말의 행적이 문제가 되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가운데 미술 부문에 포함되었다. 1925년 삭성회에서 서양화 공부를 시작, 1931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반 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풍경을 그린 유화가 입선하여 등단했다.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1936년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49년 창립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그 뒤 이화여자대학교, 홍익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1955년 프랑스에 유학했다. 1960년부터 서라벌예술대학, 중앙대학교 교수 등으로 재직했다.

김관호·김찬영 등이 1925년 평양에서 결성했던 미술가 단체인 삭성회(朔星會)에서 서양화 공부를 시작하였다. 1931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반 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풍경을 그린 유화가 입선하여 등단하였으며,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1936년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美術學校]를 졸업하였다. 1938~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연 5회 특선을 하고 2회 수상하였으며, 이 무렵 일본의 문부성미술전람회(문전)에서도 3회나 입선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일제가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전쟁 분위기를 고취하기 위해 개최한 결전미술전에도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한국과 일본의 서양화가들이 공동 결성한 단광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개인전도 5회를 여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8·15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 미술인 모임인 조선미술가동맹이 결성되었을 때 중앙집행위원과 회화부 위원장을 맡았으나, 이후 조선미술가동맹이 조선미술동맹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정치 논리가 미술에 개입하는 데 반대하고 순수미술을 옹호하여 우파적 입장을 개진하였다. 1949년 창립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추천작가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 이화여자대학교·홍익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1955년 프랑스로 건너가 1959년까지 파리 아카데미 그랑 쇼미에르에서 수학하면서 파리 국제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 한편 개인전 등을 열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의 작품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파리 유학 전에는 사실주의적 경향이 강했으나, 유학 후에는 환상적이고 추상적인 화풍으로 변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그는 1960년부터 서라벌예술대학·중앙대학교 교수 등으로 재직하였으며, 1972년 국전심사위원장으로 선임되고,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3·1문화상, 국민훈장 문화장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말의 행적이 문제가 되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가운데 미술 부문에 포함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파리의 서커스〉·〈신개지 新開地〉·〈산과 서울〉 등이 있으며, 작품집으로 〈박영선 체불 작품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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