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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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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13, (지금의 체크) 프라하 |
국적 | 트란실바니아 |
요약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반 투르크 정책을 고집해 내전을 불러일으켰다. 1581년 트란실바니아 왕위를 계승했으며 1588년에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다.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으로 하여금 신성 로마 제국과 맞서 싸우게 함으로써 트란실바니아가 사실상의 독립을 유지하는 정책을 뒤바꾸어 투르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정책변경은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로마 가톨릭교도였던 바토리는 1599년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슐레지엔의 오펠른 공작령과 교환조건으로 자신의 군주지위를 헝가리 왕인 루돌프 2세에게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루돌프는 미하이를 지원했고, 미하이는 바토리의 아들 안드라스를 격퇴하고 자신을 트란실바니아의 군주로 선포했다. 바토리는 미하이에게 쫓겨나 초라한 신세가 되어 죽었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반투르크 정책을 고집해 내전을 불러일으켰다. 1575~81년 트란실바니아 군주였던 크리스토프 바토리의 아들이며 이슈트반(폴란드의 왕 스테판 바토리, 1575~86 재위)의 조카였던 바토리는 1581년 트란실바니아 왕위를 계승했으며 1588년에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다. 외국인 고문 알폰소 카릴로의 조언에 따라 행동하면서 바토리는 트란실바니아의 전통적인 정책, 즉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으로 하여금 신성 로마 제국과 맞서 싸우게 함으로써 트란실바니아가 사실상의 독립을 유지하는 정책을 뒤바꾸어 투르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정책변경은 반란을 불러일으켜 1595년까지 반란이 진압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1594년 몰다비아의 이론과 왈라키아의 미하이 등의 제후들과 합세해 투르크인과 싸웠으며 1595년 10월 25~27일 주르주(지금의 루마니아에 있음)에서 오스만 군대를 격파한 후 미하이를 위해 왈라키아를 정복했다(→ 투르크제족).
로마 가톨릭교도였던 바토리는 점차 반동종교개혁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대부분 프로테스탄트였던 트란실바니아의 지도적인 민족주의자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1599년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 바토리는 아내인 오스트리아의 크리스티나 공주와 별거했으며 슐레지엔의 오펠른(오폴레) 공작령과 교환조건으로 자신의 군주지위를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황제이자 헝가리 왕인 루돌프 2세에게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루돌프는 미하이를 지원했으며 미하이는 바토리의 아들 안드라스를 격퇴하고 자신을 트란실바니아의 군주로 선포했다. 바토리는 1600, 1601년에 자신의 지위를 되찾으려고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미하이에게 쫓겨났으며 초라한 신세가 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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