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957/958 |
---|---|
사망 | 1025. 12. 15 |
국적 | 비잔티움 |
요약
비잔티움의 황제(976~1025 재위).
(영). Basil Ⅱ. 별칭은 불가르족(族)의 학살자 바실리오스(Basíleios Bulgaroctonus).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을 발칸 반도(특히 불가리아), 메소포타미아, 조지아, 아르메니아로 넓혔으며, 국내에서는 강력한 군벌귀족과 교회의 토지이권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였다.
역대 비잔티움 황제 가운데 뛰어난 사람으로 꼽히는 바실리오스 2세의 통치는 비잔티움식 행정제도의 장단점을 한꺼번에 잘 보여준다. 비잔티움 제국은 독재체제 때문에 통치자의 성격에 따라 국가가 크게 좌우된다는 취약성을 갖고 있었으나, 바실리오스 2세의 굴할 줄 모르는 강한 성품과 영민한 정치적 수완은 그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바실리오스는 비잔티움 황제 로마누스 2세와 테오파노 사이에 난 아들로서 960년에 그의 형제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공동황제위에 올랐으나 두 사람 다 미성년이었으므로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963년 아버지가 죽자 군 출신의 원로 황제들이 실권을 쥐었는데 처음에는 의붓아버지인 니케포루스 2세 포카스가, 그 다음에는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가 나라를 다스렸다. 976년 요한네스가 죽은 뒤에는 바실리오스의 종조부이며 실력자였던 환관 바실리오스(Basíleios the chamberlain)가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와 바실리오스 2세의 권위는 황제 자리릍 탐내는 두 장군들에게 도전받았다. 이들은 모두 황제들과 인척이었고 권세있는 영주가문에 속했으며 외부세력인 바그다드의 칼리프와 조지아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 끝에 결국 두 장군은 989년 바실리오스 2세에게 패배했는데, 여기에는 키예프의 블라디미르가 이끄는 러시아군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블라디미르는 그 보답으로 키예프국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는 조건으로 바실리오스 2세의 누이 안나와 결혼했다.
러시아군 일부는 바실리오스 2세의 휘하에 계속 남아 유명한 바랴크 근위대가 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마침내 단독 통치권을 내세워 985년 종조부를 추방했다.
바실리오스 2세의 통치목표는 오로지 국내외에서 제국의 세력을 넓히고 권위를 굳히는 데 있었다. 그는 시리아, 아르메니아, 동방의 조지아, 발칸 반도, 남부 이탈리아 등에서 전쟁을 벌였다. 시리아에서는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침공에 맞서 비잔티움 제국의 지위를 지켰으며 때로는 안티오크를 구원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아시아를 가로질러 강행군을 벌이기도 했다.
침략과 외교를 통해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로부터 영토를 빼앗았으며 아르메니아 왕이 죽은 뒤에는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로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무엇보다도 차르인 사무엘이 재건한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상대로 끈질기게 전쟁을 벌여 결국 승리한 것 때문이었다. 사무엘은 활동 근거지를 마케도니아에 두고 서부 발칸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비잔티움과 불가리아 사이에는 986~1014년에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졌다.
이따금 바실리오스 2세가 동방전선의 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몇 번 원정을 떠날 때 잠시 휴전이 있었을 뿐이다.
바실리오스 2세는 베네치아의 지원을 얻어 달마치야 해안과 아드리아 해를 불가리아에게서 지켰다. 해가 갈수록 그는 사무엘의 영토를 서서히 차지해나가면서 계절에 관계없이 계속 전투를 벌였다. 마침내 그는 불가리아 북부와 중부를 장악하고 사무엘 치세(治世) 때의 수도인 오크리다로 진격해 적을 궤멸시키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불가르족의 학살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당시 그는 불가리아 군대의 거의 대부분을 장님으로 만들었으며, 100명당 1명씩 눈 1개만을 남겨 자기네 황제에게 돌아갈 수 있게 했다. 사무엘은 이 참혹한 정경을 본 직후 충격으로 죽었다. 재건된 불가리아 제국은 이렇게 해서 비잔티움 제국에 통합되었다. 이어서 바실리오스 2세는 더욱 서쪽으로 눈길을 돌려 이탈리아 남부에 대한 비잔티움의 지배권을 강화하고 시칠리아를 아랍인들에게서 되찾겠다고 마음먹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인을 로마 교황으로 옹립하고, 독일 통치자 오토 3세(절반은 비잔티움 혈통이었음)를 자신이 총애하는 조카딸 조이와 결혼시켜 그와 연합하려고 했다.
이런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노력으로 남부 이탈리아에는 질서가 회복되었고, 그가 죽을 당시 비잔티움은 시칠리아 재정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군사외교 활동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바실리오스 2세의 비정하고 완강한 성격은 국내 정책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그는 지나치게 강력해진 신하들, 특히 소아시아에서 제후처럼 군림하던 군벌 가문들을 타격하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것을 국내정책의 중점으로 삼았다. 이 정책은 부수적으로 소농민에 대한 제국의 보호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와 소농민 중 일부는 직접 황제와 중앙정부에 군역과 세금을 바치기도 했다.
토지소유권에 대해 엄밀한 감사를 실시하고 대규모 영지는 임의로 몰수했다. 바실리오스는 전쟁에 과다한 비용을 들였지만 이러한 국내정책으로 넉넉한 재정을 꾸렸으며 그 일부는 특별히 지은 지하실에 보관했다.
당대의 역사기록과 필사본 삽화들을 보면 바실리오스 2세는 키가 작고 균형잡힌 몸매에 반짝이는 연푸른색 눈과 둥근 얼굴, 무성하게 자란 구레나룻을 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화났을 때나 접견할 때면 손가락으로 수염을 꼬는 버릇이 있었고, 검소한 복장을 즐겼으며, 화려한 자주색 옷을 입을 때도 어두운 색조만을 골랐다.
무뚝뚝한 연설자로서 수사학을 경멸했으나 재치를 부릴 줄 알았다. 그는 인색하고 엄격하며 성질이 급한 인물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마치 보초병처럼 긴장 속에서 지냈다고 한다. 이는 그가 무사안일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학예(學藝)에 뚜렷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관례적인 신앙에 따라 종교적인 예술작품 제작을 청탁하기도 하고, 보이오티아와 아테네에 교회와 수도원을 재건하거나 완공시키기도 했다. 그는 결혼하거나 자식을 둔 적이 없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상황을 지배할 만한 유능한 군사귀족 또는 다른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