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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시대의 묘사로는 문묘·관왕묘·숭인전·서원이 있다. 성균관 문묘에 종사된 인물 18명 중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을 제외하면 안향·정몽주·조광조·이언적·이황·이이·송시열 등 송나라 유학을 중시한 성리학자로 당시 학문의 편향된 성격을 보여준다. 관왕묘는 중국 촉한의 장군인 관우를 제사지내는 곳이다. 경상북도 성주와 안동 지방에 명나라 군대가 세운 관왕묘가 남아 있고, 뒤에 서울에 동묘·남묘가 세워졌다. 숭인전은 1325년 기자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전각으로 평양에 있다. 서원에 제향되는 인물은 뛰어난 유학자여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으나 후기에는 당쟁에서 희생된 인물이나 높은 관직을 지낸 관리, 선치수령, 행의 있는 수령 등 남향과 외향이 나타나 당쟁에서 희생된 자기파 인물에 대한 신원의 성격을 지니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묘사로는 문묘·관왕묘·숭인전(崇仁殿)·서원이 있다.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從祀)된 인물을 보면 18명 중 신라 때의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을 제외하면 안향(安珦)·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이이·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조헌(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 등 모두가 송나라 유학을 중시한 성리학자로 당시 학문의 편향된 성격을 보여준다. 관왕묘는 중국 촉한(蜀漢)의 장군인 관우를 제사지내는 곳이다.
관왕을 신으로 섬기면 전쟁 관우의 신령이 나타나 적을 멸한다는 믿음에 따라 한국에서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군대가 일본군을 격퇴시킨 것이 관우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 하여 관우묘를 세운 것이 그 시초이다. 경상북도 성주와 안동 지방에 명나라 군대가 세운 관왕묘가 남아 있고 뒤에 서울에 동묘(東廟)와 남묘(南廟)가 세워졌다. 1년에 2차례 제사를 지냈으며 국왕이 직접 제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숭인전은 1325년(충숙왕 12) 기자(箕子)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전각으로 평양에 있다.
서원에 제향(祭享)되는 인물은 원래 뛰어난 유학자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으나 후기에는 당쟁에서 희생된 인물이나 높은 관직을 지낸 관리, 선치수령(善治守令), 행의 있는 수령, 심지어는 자손이 귀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향되는 등 남향(濫享)과 외향(猥享)이 나타나 당쟁에서 희생된 자기파 인물에 대한 신원(伸寃)의 성격을 지니기도 했다. 또 동일한 사람에 대한 중첩된 서원건립이 성행하여 국가에 의해 첩설(疊設)이 금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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