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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스팡

다른 표기 언어 Françoise-Athénaïs de Rochechouart, marquise de Montespan
요약 테이블
출생 1641. 10. 5, 프랑스 토네샤랑트
사망 1707. 5. 27/28, 부르봉라르샹보
국적 프랑스

요약 왕비의 시종으로 궁에 들어가 루이 14세의 정부가 되어 왕의 자녀 6명을 낳았다. 이 자녀들은 나중에 모두 적자로 인정받았다.
모트마르 후작의 딸이며 1663년 몽테스팡 후작과 결혼해 2명의 자녀를 두었다. 1664년 프랑스 왕비인 스페인 공주 출신 마리 테레즈의 시종으로 임명되어 궁에 들어갔고 1667년에는 왕의 정부가 되었다. 전남편 몽테스팡 후작은 분개했으나 1668년 기옌으로 추방되었고, 1674년에는 아내와 법적으로 이혼했다. 1679년 독물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녀는 1667년부터 마녀 라 부아쟁의 고객이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러한 사건에 휘말리고 왕이 마담 맹트농에게 마음이 옮겨간 상태였는데도 그녀는 오래도록 궁정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결국 1691년 파리의 생조제프 수도원으로 물러나 그곳 수도원장이 되었다.

모트마르 후작(1650년부터 공작)의 딸이며 1663년 몽테스팡 후작과 결혼해 2명의 자녀를 두었다. 1664년 프랑스 왕비인 스페인 공주 출신 마리 테레즈의 시종으로 임명되어 궁에 들어갔고 1667년에는 왕의 정부가 되었다.

1669년에 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1672년 죽었고 그외에 왕의 자녀 6명을 낳았으며 그들은 모두 나중에 적자로 인정받았다.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1670~1736), 벡생 백작 루이 세자르(1672~83), 처음에는 마드무아젤 드 낭트로 알려졌다가 뒤에 부르봉 공작부인이 된 루이 프랑수아즈(1672~83), 마드무아젤 드 투르로 알려진 루이 마리(1676~81), 처음에는 마드무아젤 드 블루아 2세로 알려졌다가 나중에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된 프랑수아즈 마리(1677~1749), 툴르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1678~1737)가 그의 자녀들이다. 전남편 몽테스팡 후작은 분개했으나 1668년 기옌으로 추방되었고, 1674년에는 아내와 법적으로 이혼했다(1701).

1679년 독물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녀는 1667년부터 마녀 라 부아쟁의 고객이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러한 사건에 휘말리고 왕이 마담 맹트농에게 마음이 옮겨간 상태였는데도 그녀는 오래도록 궁정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결국 1691년 파리의 생조제프 수도원으로 물러나 그곳 수도원장이 되었다(→ 독물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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