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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35. 11. 28, 프랑스 푸아투 니오르에서 세례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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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19. 4. 15, 생시르 |
국적 | 프랑스 |
요약
맹트농은 정식으로 왕비칭호를 받지는 않았지만, 품위있고 경건한 궁정 분위기를 만드는 데 힘썼으며, 귀족출신의 가난한 소녀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생시르에 세웠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의 손에 그녀는 1651년 25세 연상의 희극 시인 폴 스카롱과 결혼했다. 남편의 살롱을 주도하면서 당대의 지식인들과 귀부인들과 교류했다. 남편이 죽은 후에 친구 중의 하나이며 루이 14세의 정부인 몽테스팡과의 친분으로 왕의 서자들인 몽테스팡의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1683년 7월 왕비와 사별한 후 그녀와 결혼했다. 그녀는 국왕의 내연의 처로서 자기 남편 주위에 품위와 위엄과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고자 노력했다. 그녀는 파리 근교의 생시르에 귀족출신의 가난한 젊은 여성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메종 루아얄 드 생루이를 세웠고 자주 찾아 자신의 교육자의 자질을 발휘했다.
정식으로 왕비칭호를 받지는 않았다.
품위있고 경건한 궁정 분위기를 만드는 데 힘썼으며 생시르에 귀족출신의 가난한 소녀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세웠다(1686).
프랑수아즈는 아버지 콩스탕이 빚을 지고 갇혀 있던 푸아투의 니오르 감옥에서 태어난 것 같다. 그녀는 1635년 11월 로마 가톨릭교도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할아버지 아그리파 오비녜는 시인이자 앙리 4세의 친구로 뛰어난 위그노 군인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같은 재능이나 장점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프랑수아즈는 7세까지 뮈르제이 성에서 할아버지 아그리파가 총애하는 딸 빌레트 고모의 보호 아래 칼뱅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1645년 콩스탕은 감옥에서 풀려나자 자신이 마리갈랑트 섬의 총독에 임명되었다고 믿고서 가족을 데리고 서인도로 갔으나 이미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혼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의 가족은 마르티니크에 남아 2년 가까이 살다가 돌아왔다. 1647년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죽은 뒤 또다시 빌레트 고모에게 맡겨졌으나 또다른 고모인 뇌양 부인이 그녀에 대한 양육권을 주장했다.
결국 프랑수아즈는 가톨릭교도이며 그녀의 딸이 프랑수아즈의 대모(代母)인 뇌양 부인에게 가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프랑수아즈가 16세가 되던 해 어머니가 죽자 고아가 된 그녀를 떼어버리려 한 뇌양 부인은 다리를 절고 그녀보다 25세나 나이가 많은 작가, 폴 스카롱에게 그녀를 맡겼다. 1652년 그녀는 그 작가와 결혼했는데 후에 이 관계에 대해 "수녀원 생활보다는 그와 결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남편을 돌보는 일 외에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초대되는 살롱의 여주인 노릇도 해야 했으며 결혼생활은 행복했던 것 같지 않다.
〈희극적 이야기 Le Roman Comique〉의 저자인 남편은 어린 아내를 지적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불량한 사람이었고 그녀를 타락시키려 했다. 한편 그의 살롱에 자주 드나들던 남자들은 젊은 그녀를 유혹했으며 그녀도 차츰 익숙해지면서 이를 즐겼다. 1660년 남편이 죽어서 마침내 자유로워졌지만 무일푼이었다. 25세의 젊고 아름다웠던 그녀는 처음에는 고급매춘부가 될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대신 은둔지나 다름없는 수도원에서 지내면서 귀부인다운 세련되고 교양있는 생활로 좋은 평판을 얻고자 했다.
스카롱 살롱 시절에 사귄 많은 세력가들의 도움으로 왕태후 안 도트리슈로부터 2,000파운드를 받기도 했다.
나중에는 여러 연인들을 사귀면서도 신중함을 잃지 않아, 현명하고 신앙심이 깊으며 심지어 얌전하다는 평까지 받았다. 1668년 운명을 뒤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인 몽테스팡 후작부인이 국왕의 정부가 되어 수줍음 많은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를 밀어내고 곧 아기를 가졌다.
그러나 몽테스팡이 유부녀인데다가 왕도 추문을 바라지 않았으므로 비밀리에 아기를 낳기로 하고 아기를 받아 숨겨줄,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았다. 능력과 신중함이 필요한 이 일에 스카롱 부인, 즉 맹트농은 선견지명을 발휘해 이 일을 맡았고 그때부터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1669년 3월에 태어났고 그뒤로도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사이에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다. 3번째 아이가 태어난 뒤 파리로 이사한 몽테스팡의 집에 국왕이 가끔씩 들렀고 자연히 그녀를 만날 기회도 많아졌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루이 14세보다 3살 많은 36세였다. 1673년 12월 국왕은 몽테스팡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자기 자식으로 인정하고 아이들과 가정교사격인 그녀를 생제르맹에 있는 왕의 저택에서 살게 했다.
1674년 12월 그녀는 국왕의 도움으로 맹트농 성을 사들였고 1675년초 루이 14세는 그녀가 소유한 이 성의 이름을 따 '맹트농' 후작작위를 내렸다. 맹트농 후작이 된 그녀는 1679년 왕세자비의 제2시종이 됨으로써, 왕의 아이들을 돌보는 의무와 때로 몹시 사이가 나쁘기도 했던 몽테스팡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1683년 7월 30일 왕비가 죽은 뒤로 루이 14세는 평생 오직 한 여인 '라 스카롱'만을 사랑했는데, '라 스카롱'이란 말은 그녀의 적들이 첫남편인 폴 스카롱의 이름 앞에 여성관사 '라'를 붙여 그녀를 스카롱의 여자라고 비꼬듯이 부르던 이름이었다.
왕이 그녀와 결혼한 시기는 1683년 10월이라고도 하고 1697년 4월 또는 5월이라고도 한다. 결혼 이유에 대해서도 진정한 의미의 결혼을 위해서였다고 하는 역사가도 있고 1673~80년 사이에 이미 시작되었을 그들의 관계를 공식적인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이도 있다.
그들이 1683년에 결혼했다면, 루이 14세와 맹트농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죽기(1700) 전 16년을 포함해 32년을 함께 산 셈이다. 후사가 없었던 카를로스 2세가 왕국을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에게 넘겨준 뒤로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이 전쟁을 계기로 프랑스 왕권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그들의 결혼날짜를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루이 14세의 실책과 오류를 그녀의 책임이라고 비난해왔기 때문에 맹트농의 정치적 역할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녀는 1700년 이전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루이 14세의 재위기간 마지막 15년 동안도 매우 신중했고,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권리를 부정한 1685년 낭트 칙령(1598) 철폐에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녀는 루이 14세의 내연의 처로서 자기 남편 주위에 품위와 위엄과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고자 노력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많은 점들을 고려해볼 때, 자크베니뉴 보슈에 주교와 협력해 프랑수아즈 페넬롱을 박해한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 사건'만 뺀다면, 그녀의 역할은 유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파리 근교의 생시르에 귀족출신의 가난한 젊은 여성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메종 루아얄 드 생루이(생시르로 알려져 있음)를 세웠는데(1686) 라신의 극시 〈에스테르 Esther〉는 이 학교에서 공연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설립 초기에 생시르는 현대적인 학교라는 평을 받았다. 궁정생활의 구속을 피해 자주 생시르를 찾았던 맹트농은 그곳에서 교육자의 자질을 발휘했으며 스스로도 그러한 재능이 있다고 믿었다. 1715년 루이 14세가 죽은 뒤 4년을 더 살다가 결국 병에 걸려, 1719년 은신처인 생시르에서 생을 마쳤다.
격렬한 증오와 최상의 존경을 동시에 받았던 그녀는 오늘날까지 교과서에서 탐욕스럽고 사악한 고집쟁이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희귀한 운명을 타고났으나 그것에 굴복하지 않은, 야심많은 여성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나폴레옹 1세가 세인트헬레나의 유배지에서, 마담 드 세비녜의 편지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고 말한 일화가 전해지는 그녀의 서간집은 여전히 흥미있게 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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