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04. 10. 18, 타이 방콕 |
---|---|
사망 | 1868. 10. 15, 방콕 |
국적 | 시암 |
요약 시암(타이의 옛 이름)의 왕(1851~68 재위). Phrachomklao라고도 함. 시호는 라마 4세.
시암을 유럽 세력에 개방하고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했다.
라마 2세의 자녀 중 43번째였지만 왕비로부터는 처음 태어난 아들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이을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1824년 라마 2세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0세였기 때문에 왕위계승을 결정짓는 의회에서는 경험 많은 이복형을 프라낭클라오 왕(라마 3세)으로 정했다. 그후 몽꿋은 정치에서 초연해지기 위해 승려가 될 것을 결심했다. 몇 년 후 깨달음이 높은 경지에 이른 승려를 만나 초기 불교의 엄격한 계율과 교리에 전념했으며, 이후 탁월한 학자로서 방콕 사원 원장이 되어, 사원을 지식인들이 모여 담론하는 중심지로 만들었다. 점차 미국과 프랑스의 선교사들도 이곳에 드나들게 되었고 서양의 언어와 과학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그는 역대 시암의 왕들이 가보지 않은 시골을 돌아보기도 했다. 그가 발전시킨 개혁 불교는 그후 타마유트 종단으로 성장하여 오늘날 타이 불교의 지적 중심지가 되었다. 1840년대 그의 동료 중에는 서양에 관심을 가진 진보적 성향의 왕자와 귀족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서양과 타협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어 1851년 라마 3세가 죽자 앞장서 몽꿋의 왕위 추대를 추진했다.
이 집단을 이끈 솜데트 차오 프라야 시 수리야우옹은 몽꿋 왕 밑에서 유능한 총리가 되었다. 이 두 사람은 1855년초부터 영국·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에게 시암의 완전개방을 약속하는 통상조약을 맺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보 조치는 다음 세대가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적 압력을 겪지 않게 해주고 시암에 급속한 경제발전을 가져온 반면, 치외법권·관세·세제정책상의 제한까지도 감수해야 했다.
몽꿋 왕은 세계의 지도자들에게서 동등한 대우를 받고자 하여 이들과 서신 왕래도 했다. 미국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에게는 미국의 개발에 쓸 코끼리를 선물로 보내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또한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시암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했다. 인접한 다른 나라들의 몇몇 지배자들의 외국에 대한 반감과 고립주의에 비해 그의 관용과 개방정책이 유럽 제국주의자들을 다루는 데는 훨씬 효과적이었다.
한때 시암의 왕실에서는 애나 리오노언스라는 영국인 여자 가정교사를 채용했는데, 그녀가 쓴 회고록에 기초를 두고 몽꿋 왕을 모델로 한 20세기의 뮤지컬 코미디 〈왕과 나(The King and I)〉가 만들어졌다(→ 리오노언스). 몽꿋 왕은 자신의 통치기간에 근본적인 내부개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아들들에게는 자유주의적인 서구식 교육을 받도록 배려하여 그들 세대에서 시암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왕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