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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12. 2. 28, 프랑스 샤토드캉디아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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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59. 9. 14, 캐나다 퀘벡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장군.
프랑스와 영국이 식민지를 놓고 세계 각지에서 싸움을 벌인 7년전쟁 때 캐나다 주둔 프랑스군 총사령관(1756~59)을 지냈다.
이미 12세 때 군대에 기수로 들어갔다. 첫번째 실전은 1733년 폴란드 왕위계승전쟁(1733~38)에서 오스트리아군과 벌인 싸움이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48) 때는 프라하를 방어하면서(1742) 뛰어난 공을 세웠고 1743년에는 대령으로 오세르 연대를 이끌었다.
피아첸차 전투(1746)에서도 눈부신 전과를 올렸으나 5군데나 칼로 베이는 상처를 입고 포로로 잡혔다. 나중에 포로교환으로 되돌아왔고, 1747년 여단장으로 진급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병연대를 지휘했다. 1735년 아버지의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아 가족과 함께 캉디아크에서 몇 년을 보냈다. 1756년 소장 계급으로 북아메리카 주둔 프랑스 정규군을 지휘하도록 임명받았으나 군사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큰 권한을 갖지는 못했다. 그는 식민지의 총독인 보드뢰일 후작과 마찰을 빚었는데 이 적대관계로 말미암아 효과적인 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몽칼름은 능숙한 지휘관으로서 초기에는 영국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1756년 오스웨고에서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온타리오 호(湖)의 완전한 통제권을 되찾았고, 1757년에는 2,500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윌리엄 헨리 요새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때 프랑스와 동맹한 인디언들이 상당수의 영국군 포로들을 살해한 오점을 남겼다. 그가 세운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약 3,800명의 병력으로 영국의 제임스 애버크럼비 장군이 이끄는 1만 5,000명의 공격을 격퇴시킨 타이콘더로가 전투(1758. 7. 8)였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이 2,000명의 희생자를 낸 데 비해 프랑스는 372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이 승리는 애버크럼비가 무능했기 때문이었지만 몽칼름은 중장으로 진급했고 군사문제에서만큼은 보드뢰일 총독보다도 큰 권한을 누렸다.
1759년 영국은 제임스 울프 장군이 이끄는 8,500명의 육군을 퀘벡에 파견했다(→ 퀘벡 전투). 몽칼름 휘하의 1,500명은 몽모랑시 강 제방 위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2개월 동안 접전을 피했다. 마침내 울프 장군의 부대가 에이브러햄 고원을 지나 퀘벡 근처에 도착하자 몽칼름의 부대는 전투(9. 13)를 피할 수 없었으며 결국 패배했다. 그 자신은 매우 용감하게 싸웠지만 흩어진 부대를 재정비하기 위해 애쓰다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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