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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0, 이란 테헤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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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7. 3. 5, 테헤란 |
국적 | 이란 |
요약
이란의 정치가.
Mosaddeq는 Masaddiq, Mossadegh라고도 씀.
1951~53년 총리를 지냈다. 이란 내 영국 석유회사를 국유화시키고 국왕의 축출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고위공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스위스의 로잔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14년 귀국해 파르스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1921년 레자 칸이 집권한 뒤에도 정치생명을 잃지 않고 재무장관 및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23년에는 마질레스(의회)에 진출했다.
1925년 레자 칸은 샤(국왕)로 선출되었고 이에 반발한 모사데크는 공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941년 레자 샤가 추방된 후, 모사데크는 다시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모사데크는 소련이 남부에서 영국이 행사하고 있던 석유채굴권과 비등한 이권을 북부 유전지대에 대해 요구해오자 이를 거부했다. 그는 영국-이란석유회사(지금의 브리티시석유회사)의 국유화를 주장함으로써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51년 3월 마질레스는 그의 국유화법을 가결시켰고 국왕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는 모사데크를 총리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레자 샤 팔라비).
국유화 조치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란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민족전선당과 모사데크가 정권을 유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많은 지지자들이 등을 돌렸고 특히 지배계층과 서유럽 국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영국은 이란의 석유 시장을 완전히 포기했고 다른 석유시장을 찾지 못한 이란의 경제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모사데크와 국왕 사이의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1953년 8월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가 총리의 축출을 기도하자 거리로 쏟아져 나온 지지군중들이 국왕을 강제 퇴위시켰으나, 며칠 후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대파들은 정권을 뒤엎고 국왕을 권좌에 복귀시켰다. 모사데크는 반역죄로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형기를 마친 뒤에도 죽을 때까지 자택에 연금되었다. 모사데크로 말미암아 이란의 석유 산업은 정부의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잠옷 차림으로 대중 앞에 나타난다거나, 의사당에 침대를 들여놓고 누워서 연설을 한다거나, 자주 울음을 터뜨리는 등 그가 총리 재임기간중에 보인 기이한 행동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이런 기이한 행동이 병 때문이라고 변호하기도 했지만 적대자들은 그것을 교활한 대중선동술이라고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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