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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모라비아 교회가 벌인 선교활동은 서인도 제도의 흑인 노예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1732). 그러나 그들의 선교 동기가 분명하지 않았고, 유럽에서의 지위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1735년 조지아로 갔다. 친첸도르프는 아메리카에서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고국에서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기대했다. 조지아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이들은 1740년 펜실베이니아로 가서 나자렛과 베슬리헴을 세웠다.
친첸도로프가 펜실베이니아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소종파들과 루터파, 개혁파 교회 배경을 가진 많은 독일인 이주자들을 하나의 연합교회로 조직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 때문이었다. 아메리카에서 14개월을 보내며(1741~43), 유럽의 계획을 본뜬 선교계획을 세웠다. 교회의 일치를 이루겠다는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으나 신대륙에 모라비아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유럽과 미국에 있는 몇몇 모라비아 교회들은 폐쇄적공동체를 이루었으나, 다른 교파와 친교를 나누는 모라비아 교회들도 있었다. 약 1세기 동안 펜실베이니아의 베슬레헴, 나자렛, 리티츠, 노스캐롤라이나의 세일럼(지금의 윈스턴세일럼)에서는 모라비아교도들끼리만 살았다. 베슬레헴 출신의 모라비아교인들은 1753년 최초의 노스캐롤라이나 교회를 세웠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인디언, 인근의 유럽인 이주자, 해외의 원주민을 위한 선교활동과 복음전도 프로그램이 퍼져나갔다. 특히 독립전쟁 이후 교회 밖에서 온 많은 어린이들이 모라비아 교회 기숙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그러나 모라비아 교회는 교파적 전망보다는 디아스포라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규제되었으며 폐쇄적인 공동체였기 때문에 규모가 작았다. 교회는 19세기 중엽 국제적인 단체로 다시 조직해 미국인들에게 보다 많은 자율성을 허락할 때까지 크게 성장하지 않았다. 북아메리카 교회는 대부분 독일과 노르웨이에서 온 이주민들로써 성장했지만, 노스캐롤라이나 교회는 주로 토착민들이 점점 많이 교회로 들어왔기 때문에 컸다.
미국 모라비아 교회는 1771년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북부와 남부 관구로 나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 두 관구는 공동의 해외선교위원회와 신학교를 두었으며, 목회자들의 자유로운 교환이 이루어졌다. 윈스턴세일럼에 있는 세일럼대학과 베슬레헴에 있는 모라비아대학은 모라비아 교회와 관련이 있다. 다른 미국 모라비아 교회 집단인 형제단은 모라비아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해외선교에 협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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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북아메리카의 모라비아 교회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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