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596, 잉글랜드 랭커셔 로턴 |
---|---|
사망 | 1669. 4. 22, 매사추세츠 도체스터 |
국적 | 미국 |
요약 영국 태생 미국의 회중교회 목사.
인크리즈 매더 신부를 포함해 4명의 아들이 청교도 목사이다. 영국에서 뉴잉글랜드로 간 청교도들의 대이동 때(1635)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뒤, 매사추세츠 도체스터에서 '교육' 목사로 선출되었으며, 설교가로, 회중교회신도 및 정책작성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5세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옥스퍼드대학교의 브레이스노즈 칼리지에 들어가 학문에 열중했다.
1618년 톡스테드 주민들의 요청으로 옥스퍼드대학교를 떠나 목사가 되었으며, 체스터의 주교에 의해 성직에 임명되었다. 철저한 청교도였던 그는 영국국교회가 가톨릭 교회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겉치레와 의식을 거부했으며, 15년 동안 톡스테드에서 성직자복을 입지 않고 설교하다가 결국은 당국에 발각되었다. 그로 인해 성직을 잠시 박탈당했다가 복직되었으나 성직자복을 입는 관행을 여전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법정에서도 그는 성직자복을 입지 않은 것은 시인했으나 사과는 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영원토록 "공적으로 말씀을 설교할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성직에서 물러나 개인적인 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설교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1624년에 결혼한 아내 캐서린 호울트와 4명의 아들을 이끌고 1635년 6월 미국 항해길에 올라 8월에 보스턴에 도착했으며, 그가 쓴 항해일지는 그의 탁월한 저서 중 하나이다.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평판이 알려져 여러 마을로부터 목사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매사추세츠의 도체스터를 선택해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목회를 했다. 거기서 2명의 아들, 엘리에저와 인크리즈를 낳았다. 6명의 아들 중에서 4명이 목사가 되었다.
새뮤얼과 너새니얼은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650년 영국 제도로 돌아갔고 새뮤얼은 그곳에서 학위를 받아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연구원이 되었다가 나중에 목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더블린에서 봉사했다. 너새니얼은 반스터플에서 설교하다가 나중에 더블린에서 새뮤얼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엘리에저는 노샘프턴의 목사가 되었다. 리처드는 1655년 아내 캐서린이 죽자 1년 뒤 유명한 청교도 목사인 존 코튼의 미망인 사라 코튼과 재혼했다.
그의 가장 탁월한 저술은 1648년 케임브리지 교회회의에서 채택된 '신조요약문'인데, 이는 청교도 회중교회의 신조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선언문이다. 다른 목사들과 함께 이미 알려진 율조에 맞추어져 있던 시편을 직역하여 〈베이 시편서 Bay Psalm Book〉(1640)을 펴냈다. 서문에서 그는 다윗 시편의 참되고 적절한 의미를 살려내는 것이 일차 과제이다 보니 편집자들이 문장을 시적으로 아름답게 다듬지 못했음을 양해해달라고 썼다.
임종할 때 자신이 다시 학문의 길로 돌아가지 않은 것과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한 엄격한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이 준교인이 될 수 있도록 한, 소위 '준서약'(Half-Way Covenant)의 정당성을 아들 인크리즈에게 납득시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