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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4. 5. 22, 케이프 식민지 리베크웨스트 근처(지금의 희망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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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9. 2. 7, 남아프리카 스텔렌보스 |
국적 | 남아프리카 연방 |
요약 남아프리카 연방의 총리.
최초의 보어인(人) 정부를 수립하고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격리정책)를 추진했다.
스텔렌보스에 있는 빅토리아대학에서 공부한 뒤 레트에 있는 위트레히트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케이프로 돌아온 후 네덜란드 개신교 교회의 목사직을 수행했으며 남아프리카 출생 백인들(보어인·아프리카너)의 희망을 역설하고 아프리칸스어 사용을 주장했다.
1915년 교단에서 물러나 J. B. M. 헤르초흐의 국민당을 지지하는 케이프타운 일간지 〈부르저 Die Burger〉를 편집했다. 1918년에 의회에 진출했고, 뛰어난 연설가로서 재능을 발휘했다. 이듬해 그는 민족자결주의에 입각, 남아프리카의 독립을 요청하기 위해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참석했다. 1924년에는 내무장관으로 헤르초흐의 내각에 합류하여 남아프리칸스의 국적을 확립하고 국기를 만드는 법률을 제정했으며 네덜란드어 대신에 이로부터 파생된 아프리칸스어를 연방의 공용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이전에는 단지 영어와 네덜란드어만이 공용어로 사용되었음).
1934년 헤르초흐의 국민당이 얀 스뫼츠의 남아프리카당과 합당하자 말란은 이에 대항하여 야당인 순국민당을 창설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남아프리카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 헤르초흐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던 말란과 화해했고 1939년 두사람을 중심으로 다시 국민당이 형성되었다. 1940년 12월 헤르초흐는 퇴진하고 말란이 당수에 올랐으며 1943년 총선에서 국민당은 43석을 확보했다. 보어인의 인종적 감정과 공화정에 대한 애정을 호소하며 국민당은 점차 세력을 확장시켰고 결국 아프리카너당과 제휴하여 1948년 다수당이 되었다.
말란은 총리 겸 외무장관(외무장관의 자격으로 런던의 영연방회의에 참석했음)으로서 남아프리카 연방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를 실행했다. 1953년 선거에서 승리한 뒤 이듬해 정계에서 은퇴했고 생애와 정치철학에 관한 다수의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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