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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02, 런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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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167. 9. 10, 프랑스 루앙 근처 |
국적 | 신성 로마 |
요약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딸이다. 헨리 1세가 죽자 왕위계승 쟁탈전을 거쳐 1141년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거만하고 탐욕스럽게 돈을 요구하다가 대관식 전에 옥스퍼드로 쫓겨났다.
1141년 9월 윈체스터에서 벌어진 전투 때 패배했고, 그 뒤에도 서부지역에서 꾸준히 저항했으나 점점 약해졌다. 이듬해 12월 옥스퍼드 성에서 도망쳐 얼어붙은 템스 강을 건넜다. 1148년 노르망디에서 물러나 루앙 근처에 머물면서 아들 헨리의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결국 아들 헨리가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되었다. 만년에는 노르망디에 살면서 헨리 2세가 유럽 대륙에 갖고 있던 영토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스티븐 왕이 잉글랜드를 다스릴 때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했다.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와 왕비 마틸다의 유일한 딸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상속자인 윌리엄(William the Aetheling)의 누나였다. 그녀는 2번 결혼했는데 이것은 헨리 1세가 프랑스에 대항해 노르망디 방비를 강화하려는 생각에서 추진한 일이었다.
1114년 하인리히 5세와 결혼했는데 자식도 없이 1125년 하인리히는 죽었다. 3년 뒤에는 앙주 백작작위 계승자 제프리 플랜태저넷과 결혼했다.
1120년 남동생이 죽자 헨리 1세의 유일한 합법적 상속자가 되었는데,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에는 그때까지 여성 통치자가 없었지만 헨리는 1127년 마틸다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라고 귀족들에게 강요했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마틸다와 앙주 백작의 결혼을 싫어했고 이 결혼은 그들이 예전에 정한 조항, 즉 귀족들의 동의없이는 마틸다가 잉글랜드 밖에서 결혼할 수 없다는 사항을 위반한 것이었다. 1133년 큰아들 헨리가 태어나 이러한 귀족들의 반대가 잠잠해지리라 기대했지만 그가 2살 때 헨리 1세는 죽고 말았다.
그뒤 곧 정변이 일어나 정복왕 윌리엄 1세의 딸 애덜라가 낳은 아들 블루아의 스티븐이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했다. 교회와 대부분의 귀족들은 스티븐을 지지했으나 마틸다는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1세와 그녀의 이복 오빠인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마틸다는 로버트와 함께 1139년 9월 애런들에 상륙했으나 얼마 동안 성에 갇혀 포위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뒤 곧 로버트와 합류했는데 그는 마틸다 지지자가 많던 서부지역에 가 있었다. 브리스틀에 잠깐 있다가 뒤에는 글로스터에 자리를 잡았다.
1141년 2월 스티븐이 링컨에서 붙잡히고 그해 여름 마틸다는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4월 윈체스터에서 열린 성직자 회의에서 '잉글랜드의 레이디'(lady of the English)로 뽑히고 6월 런던에 도착했으나 거만하고 탐욕스럽게 돈을 요구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대관식 전에 그녀를 옥스퍼드로 쫓아냈다. 1141년 9월 윈체스터에서 벌어진 전투 때 패배했고 그뒤에도 서부지역에서 꾸준히 저항했으나 점점 약해졌다.
이듬해 12월 그녀가 옥스퍼드 성에서 도망쳐 얼어붙은 템스 강을 건넌 것은 잘 알려진 사건이다. 노르망디는 1144년부터 남편 앙주 백작의 영토가 되었으며, 마틸다는 1148년 그곳에서 물러나 루앙 근처에 머물면서 큰아들 헨리의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헨리는 뒤에 노르망디 공작(1150)과 잉글랜드 왕 헨리 2세(1154)가 되었다. 만년에는 노르망디에 살면서 헨리 2세가 유럽 대륙에 갖고 있던 영토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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