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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8. 10. 10, 에도[江戶:지금의 도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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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0. 6. 2, 도쿄 |
국적 | 일본 |
요약 일본의 정치가.
마쓰다이라 게이에이라고도 한다. 1868년 봉건적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타도하고 덴노 중심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수립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대로 쇼군[將軍]직을 장악해온 도쿠가와 가문의 한 방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183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본 중부 후쿠이[福井]의 다이묘[大名]가 되어, 서양식 무기공장을 세우고 교육을 장려했으며 의료시설 개선에 힘썼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내항해 일본으로 하여금 외부세계와 무역과 교류를 시작하라고 압력을 넣게 되면서 일본 정부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자, 쇼군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비중있는 다이묘의 한 사람인 그를 고문으로 지명했다. 그는 처음에는 일본의 쇄국정책을 강력히 옹호했으나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해리스 조약)이 맺어지자 입장을 바꾸었다.
마쓰다이라는 쇼군 계승문제에 있어서 히토쓰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의 옹립을 주장해 도쿠가와 요시토미[德川慶福]를 옹립한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파와 대립했는데, 1858년 다이로[大老]가 된 이이는 그에게 근신처분을 내렸다. 1860년 이이가 암살되자 사면된 마쓰다이라는 1862년 새로운 행정조직 내에서 쇼군의 유력한 조언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고문이었던 유명한 요코이 쇼난[橫井小楠]의 영향을 받아, 도쿠가와 바쿠후가 강력한 다이묘들을 통제하는 데 사용했던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제도를 폐지해 다이묘들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이 제도는 다이묘들로 하여금 자기 영지와 수도에 1년씩 교대로 머무르게 한 것으로, 영지로 돌아갈 때는 가족들을 수도에 인질로 두어야만 했다. 이 제도는 왕복 행차에 소요되는 과다한 비용 때문에 다이묘의 재정을 소실하는 원인이 되는 등 비효율적인 것이었다.
그는 일본의 결속을 강력히 주창하여 정부 내에서 덴노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려 했다. 1864년 왕실의 고문으로 임명된 대영주들의 회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왕실과 바쿠후 정권의 결합, 즉 공무합체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이 붕괴되자 그는 도쿠가와 가문의 편에 서서 왕실과 도쿠가와 가문 사이의 필연적인 투쟁을 맞았다.
그는 왕실의 지지자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후 메이지 정부에서 잠시 요직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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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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