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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미국의 보수파 루터 교회.
1849년 작센지방(미주리 주에 정착)과 바이에른지방(미시간 주와 인디애나 주에 정착)에서 온 독일이민들이 시카고에서 세웠다. 미주리·오하이오를 비롯해 그밖에 여러 주의 '독일 복음주의 루터교 시노드'로서 조직되었고, 신학교 교수이며 독일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C. F. W. 발터가 1847~50년과 1864~78년 의장으로 있었다. 이 교회는 적극적인 교육 프로그램과 복음주의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전체 회중과 시노드를 흡수하는 한편 새로운 독일이민들을 항구도시에서 맞이하여 회중으로 인도함으로써 급속도로 성장했다.
1917년 '독일'이라는 말을 이름에서 빼고, 1947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미주리 시노드는 다른 루터교 단체들과의 논쟁에 자주 휘말리기도 했는데, 성서와 루터교 신앙고백에 근거를 둔 '순수교리'에 관한 자신들의 해석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고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까지는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어떤 단체들과도 연합하거나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미주리 시노드는 1872년 몇몇 소규모 보수파 루터교회와 연합하여 강한 구속력이 없는 '복음주의 루터교 시노드 총회'라는 연맹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총회는 1967년 미주리 시노드가 '미국 루터 교회'(American Lutheran Church), '미국 루터파 교회'(Lutheran Church in America), '복음주의 루터교 시노드'(Synod of Evangelical Lutheran Churches:1971년 미주리 시노드의 일부가 됨)와 연합하여 '미국 루터교 협의회'(LCUSA)라는 협력단체를 형성하자 해체되었다. 그러나 미주리 시노드는 나중에 이 협의회에서도 탈퇴했다.
1969년 정책 입안을 보수파들이 맡게 되자, 미주리 시노드는 내분이 생기게 되었고, 그 결과 1974년 컨코르디아 신학교의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이탈했고, 2년 후 10만 명의 탈퇴교인이 '복음주의 루터 교회 연합'을 결성했다. 내분의 쟁점은 회중의 자치권과 시노드의 권한 사이의 문제와, 교회 선교의 성격에 대한 것이었다. 새 교단은 미주리 시노드와는 달리 여자에게도 목사안수를 했다.
1982년 새 교단은 다른 2개의 루터교단과 연합할 것을 투표로 결정한 후 1988년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라는 이름의 교단 형성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미주리 시노드는 2년마다 열리는 총회와 거기서 선출되는 의장을 포함해 몇몇 임원들에 의해 운영된다. 회중은 지역에 따라 그룹이 나누어진다. 미주리 시노드는 교구학교·대학·신학교 등 광범위한 교육제도를 후원하고 있다. 본부의 컨코르디아 신학교는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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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루터교 미주리 시노드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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