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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예탄 앞에 선 루터
루터를 로마로 불러들이라는 교황의 소환장이 저명한 토마스주의자인 아우크스부르크의 카예탄 추기경(1468~1534)에게 발송되었다. 이 위급한 순간에 정치가 개입한 것은 어쩌면 숙명적인 일이었고, 교회에 광범위한 재앙을 초래하지 않고 루터 사건을 신속하고 과감하게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정책적인 고려에 의해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7선제후들 가운데 하나였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새로운 황제 선출이 임박했기 때문에 교황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교황은 프리드리히를 적대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카예탄 추기경과 개인적으로 면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제국의 안전통행권을 가지고 10월 7일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했다. 토론은 면죄부로부터 시작하여 신앙과 성사 은총(세례와 성만찬 때 공로를 묻지 않고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혜)의 관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두 신학자는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그리스도가 획득했다고 정의한 공로의 '보물'이 갖는 의미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격노한 카예탄 추기경은 루터에게 그의 주장을 무조건 철회하지 않으려면 자리를 뜨라고 일갈하면서 루터를 몰아냈다.
아우크스부르크로부터 도피
루터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동안 작센의 추밀원 의원들은 루터가 로마로 압송되리라는 소문을 전했다. 마침내 루터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채 뒷문을 통해 아우크스부르크를 탈출했다. 그는 교황과 에큐메니컬 공의회에 호소문을 내고 영주(프리드리히)에게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장문의 글을 보냈다.
한편 카예탄은 지체없이 루터를 프리드리히에게 고발했다. 루터는 선제후의 비서인 인문주의자 게오르크 슈팔라틴과 훌륭한 우정관계를 맺고 있어 이것이 커다란 힘이 되었지만 프리드리히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때에도 비텐베르크대학교 신학부는 루터에게 불명예를 줄 경우 신학부의 운명과 명성에 손실을 가져 올 것을 들어 루터 편에 서서 선제후에게 호소했다. 한때 루터가 프랑스나 보헤미아로 떠나야 할 것처럼 생각되던 때도 있었다. 그때 교황의 특사인 칼 폰 밀티츠가 비텐베르크에 나타났다. 그는 선제후에게 '채찍과 당근'의 전술을 구사해 그 앞에서 루터에게 집요하게 위협하기도 하고, 교황이 크게 칭찬하고 훌륭하다고 인정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황금 장미를 주어 경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1519년 1월 알텐부르크에서 교황의 특사와 면담을 마친 루터는 특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약속했음을 간파했으며, 그를 불신하게 되었다. 카예탄의 요청서에 표현된 면죄부에 대한 교황의 주장은 루터가 몇 가지 치명적인 모호성을 지적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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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루터의 아우크스부르크 면담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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