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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9. 4. 15, 미국 플로리다 크레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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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9. 5. 16, 뉴욕 시 |
국적 | 미국 |
미국 흑인사회의 정의와 평등을 위해 헌신적이고 끈기있는 투쟁을 벌였다.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랜돌프는 1911년 뉴욕시의 할렘 지역으로 이사했다.
그는 야간 시립대학을 다녔으며, 1912년에는 챈들러 오웬과 함께 사설 직업소개소를 설립하고, 그 기구를 통해 흑인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려고 노력했다. 1917년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지지하면서 두 사람은 잡지 〈메신저 The Messenger〉(1929년 이후에는 〈흑인 노동자 Black Worker〉로 개칭됨)를 창간했고, 그 잡지를 통해서 전시 산업과 군대내에서의 흑인 지위향상을 주장했다. 전후 랜돌프는 뉴욕의 랜드 사회과학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낙선을 했지만 사회당의 공천으로 공직에 출마하기도 했다.
1925년 침대차 수화물 운반인 형제단의 초대 단장이 된 랜돌프는 그 단체의 흑인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미국노동총연맹(AFL) 회원들의 절반가량이 흑인의 회원가입을 반대하자, 그의 노동조합도 AFL의 영향을 받아 흑인의 회원가입을 반대했다. 노동조합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랜돌프는 최초의 성공적인 흑인노동조합을 결성했으며, 1937년에는 그가 이끄는 형제단이 풀맨 컴패니와 처음으로 중요한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 이듬해 랜돌프는 AFL 회원들간에 팽배해 있는 인종차별적 성향에 대적하기 위해 그의 조합을 AFL에서 탈퇴시키고 대신에 새로 형성된 미국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에 가입시켰다.
그후 그는 연방정부와 산업계에 존재하는 흑인 고용문제를 연방계약법과 함께 연방정부와 산업계에 공식문서로 제출했다. 그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수천 명의 흑인노동자들을 규합하여 워싱턴 D. C.에서 항의 행진을 벌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루스벨트는 1941년 6월 25일 대통령령 제8802호를 공포하여, 방위산업체와 연방관공서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하고 공평한 고용실천위원회를 개설하도록 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랜돌프는 군대의 인종차별정책에 저항하는 비폭력 시민불복종 연맹을 창설했다. 이 기구의 운동은 1948년 7월 26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군대내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대통령령 제 9981호를 공포하도록 하는 데 일조를 담당했다.
1955년 AFL이 CIO를 합병하자, 랜돌프는 AFL의 부조합장이 되었으며, 연합조직 집행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또한 그는 흑인 미국노동위원회의 초대 위원장(1960~66)을 지냈는데, 이 조직은 랜돌프와 AFLCIO 단체내에서 인종차별금지를 위해 투쟁했던 여러 사람들이 함께 세운 것이다.
그의 1941년 시민 운동 추종자들에 의해서 랜돌프는 1963년 8월 28일 직업과 자유를 얻기 위해 수도 워싱턴에서 20만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벌인 행진의 총지휘자가 되었다(워싱턴 행진). 2년 후 그는 빈곤의 원인을 연구하고자 하는 지역 지도자들을 위하여 A. 필립 랜돌프 연구소를 세웠다. 그후 지병으로 고생하던 랜돌프는 1968년 침대차 수화물 운반인 형제단의 단장직을 사임하였으며, 공직에서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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