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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킨스의 초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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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영국의 소설가

ⓒ Jeremiah Gurney / WIKIPEDIA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유년시절

디킨스는 포츠머스에서 태어났으나 유아시절에 그곳을 떠나 가장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채텀에서 보냈는데(1817~22), 그곳은 후에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1822년부터 계속 런던에서 살다가 1860년경에 채텀 근교에 있는 전원주택 개즈힐에 정착했다. 중류층 출신의 영국해군 경리국 사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상당한 봉급을 받았으나 사치와 낭비가 심해 가족은 재정적으로 항상 궁핍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의 재정적 실패와 소비성향의 일부는 다분히 자서전적인 경향이 있는 〈데이비드 카퍼필드 David Copperfield〉에서 미코버라는 인물로 각색된다.

1824년 디킨스 가족은 완전히 재정적 파탄상태에 이르렀다. 큰아들 찰스는 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의 수공업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채무관계로 인해 감옥에까지 가게 되었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들은 어린 디킨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짧은 기간이나마 노동자계급으로의 전락은 돌이키기 싫은 경험이었으나 가난한 이들의 삶과 고통에 대해 배우고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감옥의 이미지나 상실과 억압 속에서 방황하는 어린이의 이미지가 많은 소설 속에서 되풀이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디킨스의 성격과 예술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는데, 여기에는 20세기 소설가 앵거스 윌슨이 주장하듯이, 디킨스가 후에 한 남자로서, 또는 작가로서 여성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보인 것도 포함된다.

이런 성향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당시 그가 느끼기에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돈을 벌어 오기만을 강요했던 어머니에 대한 심한 분노에서 비롯된 듯하다. 아버지의 출옥과 함께 다시 시작된 디킨스의 학교생활은 결국 15세에 끝나게 된다. 그는 변호사 사무실의 서기로 취직했다가 법정의 속기사가 되는데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법률세계에 관한 지식은 여기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러다가 의회 및 신문사 기자가 된 그는 저널리즘에 대한 지속적인 애정과 법조계 및 의회에 대한 경멸감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개혁기였던 1830년대에 성년이 되고, 특히 자유공리주의계의 〈모닝 크로니클 Morning Chronicle〉지에서 일한(1834~36) 경험은 그의 정치적 견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그에게 일어난 또다른 중요한 사건은 마리아 비드넬에게 구혼했다가 그의 가문과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거절당한 일이었다.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 희망과 그녀를 잃은 데 대한 분노는 성공에 대한 결의를 더욱 부채질했다. 당시 마리아에 대한 감정과 뒤에 다시 그의 인생에 짧게 개입하여 환멸감을 주는 그녀의 모습은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도라 스펜로에 대한 동경과 〈어린 도릿 Little Dorit〉에 나오는 중년의 아서 클레넘이 한때 매혹적으로 보였던 를로라가 "주책맞고 어리석다"고 느끼며 "백합인 채 남겨두었던 플로라가 작약이 되어 있었다"고 표현한 데서 잘 나타나 있다.

작품활동 시작

연극에 많은 매력을 느낀 디킨스는 1832년 거의 직업배우의 길을 택할 뻔하기도 했다.

1833년 그는 잡지와 신문에 단편소설과 수필들을 기고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많은 관심을 끌어 1836년 2월 〈'보즈'의 스케치집 Sketches by 'Boz'〉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같은 달에 그는 한 유명한 화가의 판화와 함께 실을 희극 연재물을 청탁받았다. 그로부터 7주 후에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 Pickwick Papers〉 연재물의 1회분이 나왔다.

보즈의 스케치집(Sketches by Boz)

찰스 디킨스가 쓴 소설

ⓒ John Macrone / wikipedia | Public Domain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은 몇 달만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고 디킨스는 일약 당시의 최고 인기작가가 되었다. 신문사 일을 그만두고 월간지 〈벤틀리 미셀러니 Bentleys Miscellany〉의 편집을 시작하면서 그는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를 연재하여(1837~39) 매달 2가지의 연재물을 쓰게 되었다. 1836년 4월 스코틀랜드 저널리스트이자 학자이던 조지 호가스의 장녀 캐서린과 결혼했던 그에게는 이미 그의 9명의 아이들 중 첫번째 아이가 태어난 때였다. 이때부터 수년간 그의 인생은 계속 분주하고 빠른 속도로 지속되었다.

연재물 형식의 글이 자신의 기호에도 맞고 재정적 보탬이 된다고 판단한 그는 〈니콜러스 니클비 Nicholas Nickleby〉(1838~39)를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과 같은 양식으로 20회에 나누어 썼고 또다시 〈골동품 가게 The Old Curiosity Shop〉(1840~41)와 〈바너비 러지 Barnaby Rudge〉(1841) 등을 더 짧은 분량의 주간물로 썼다. 결국 과로에 지친 그는 5개월 동안 미국을 여행했는데, 그의 문필적 지명도 덕분에 거의 왕실의 칙사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미국의 저작권 보호법 부재에 항의함으로써 국민감정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영국의 제반 제도를 과격하게 비판했던 그는 '나의 상상 속의 나라'로부터 많은 것을 기대했으나 권장할 만한 사회제도보다는 저속함과 혐오스러울 만큼 약삭빠른 관행 등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러한 감정의 일부는 〈미국 인상기 American Notes〉(1842)와 〈마틴 처즐윗 Martin Chuzzlewit〉(1843~44)에도 잘 나타나 있다.

초기소설들

이러한 다작 기간 동안에 나온 작품들은 매우 다양하며 희곡들을 제외하고는 꽤 훌륭한 수입원이 되었다.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은 생동감 넘치는 익살극 형태로 시작하는데, 전통적인 희극적 풍자나 재담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의 다른 초기작품들처럼 이 작품은 당대의 연극이나 18세기 영국 소설가들, 〈돈 키호테〉를 포함한 몇몇 고전들의 영향을 현저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은 진부한 인물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전초적 단계이긴 하지만 앞으로 그의 소설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다양한 경향들이 혼합된 형태로 선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악이나 부적절한 제도에 대한 풍자적이거나 비난섞인 고발, 시국문제에 관한 언급, 그의 소설 대부분의 배경이 되는 런던에 관한 백과사전적 지식, 페이소스, 다소 으시시한 공포 분위기,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서민들의 기쁨, 작품마다 넘쳐흐르는 훈훈한 정감,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지칠 줄 모르는 창의력, 상상력을 가미해 더욱 고조시키는 각 인물 특유의 독특한 대화체와 그것을 놓치지 않는 훌륭한 귀, 강력한 서술적 추진력, 아직 희극적 매너리즘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기는 해도 매우 개성있고 창의적인 산문체 등의 조짐이 이미 초기작품들에서 발견되고 있다.

잡지발행에 앞서 불과 몇 주일, 또는 며칠 전에 즉흥적으로 쓴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은 미숙한 문장들이 자주 눈에 띄며 전체적으로 볼 때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작품이다. 이는 저술과 출판을 동시에 하면서 소설가로서의 테크닉을 단시간 내에 발전시켰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놀랄만한 사실은 그렇게 씌어진 처녀작이 디킨스 작품을 일약 유명하게 만들었고 대중문학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했는가 하면 작품의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자신감과 예술적 야망이 더욱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은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이다.

이 작품은 희극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빈민 수용소나 범죄세계 같은 사회적·도덕적 악에 더욱 깊이 천착해 들어간다. 사실 디킨스 작품의 인물들과 배경에 관한 상상적 효과는 독창적인 삽화가들에 의해 한층 더 증가되었다. 가령 〈'보즈'의 스케치집〉과 〈올리버 트위스트〉의 크룩생크, 1860년대까지 다른 대부분의 소설의 삽화를 맡은 '피즈'(해블롯 K. 브라운)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또한 디킨스의 소설이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한 것은 그의 소설들이 효과적이고도 쉽게 연극으로 각색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런던의 20개의 극장이 동시에 그의 최근 소설을 각색, 무대에 올리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짧게 압축된 작품 내용에 친숙해질 수 있었다. 잔인한 요크셔 학교에 관한 고발과 같이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타난 버림받고 억압받는 어린아이를 페이소스와 사회비판의 근거로 삼는 등의 영국소설에서의 중요한 혁신은 〈니콜러스 니클비〉 같은 작품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

찰스 디킨스가 쓴 장편소설

ⓒ Richard Bentley / wikipedia | Public Domain

이런 경향은 〈골동품 가게〉에서 더욱 심화되는데 이 작품에서 어린 넬의 죽음은 비록 수십년 후에는 '빅토리아 시대적 감상'으로 일축되고 있긴 하지만, 당대에는 대단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바너비 러지〉에서는 새로운 장르인 역사소설을 시도하고 있는데, 같은 부류로서 후기의 역작 〈두 도시 이야기 A Tale of Two Cities〉처럼 이 작품은 18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대규모 민중폭동의 참상을 매우 힘있고 심도있는 필치로 다루고 있다.

폭넓은 분위기와 소재, 수십 명의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는 여러 개의 복잡한 플롯을 갖고 예술적 일관성을 창출한다는 것은 디킨스가 연재물로 글을 쓰고 출판하기 때문에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

1844년판의 〈마틴 처즐윗〉의 서문에서 그는 "이번 달 호의 유혹을 물리치고 전체적인 목적과 구성에 더 꾸준한 관심을 두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전체적 목적과 구성'에 관한 집중은 그 다음 소설 〈돔비와 아들 Dombey and Son〉(1846~48)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길이가 비교적 짧고 연재물로 발간되지 않은 크리스마스 이야기들을 쓴 경험은 그에게 좀더 소설적인 일관성을 얻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크리스마스 캐럴 A Christmas Carol〉(1843)은 착안한 지 몇 주만에 완성된 이야기로 우연찮게 새로운 문학적 장르를 창출한 작품이다.

이는 그의 여러 크리스마스 이야기 중 첫 작품이 되었다. 〈마틴 처즐윗〉을 쓰는 동안 막간을 이용해 단숨에 쓰다시피 한 이 작품은 현대문학의 위대한 크리스마스 신화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업적이었다. 디킨스는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크리스마스에 매우 의미심장한 가치를 부여했으며, 이는 대중적 인기에도 큰 공헌을 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일반적 의식 속에 깊이 파고 들었다. 한 평론에서 W. M. 새커리는 이 작품을 가리켜 "국가적 차원에서 이득이요, 그것을 읽는 모든 이에게 주는 개인적 애정표현"이라고 썼다.

이후에는 더 많은 크리스마스에 관한 책·수필·단편들이 1867년까지 거의 해마다 쏟아져 나왔다. 일부는 출판되자마자 일시적 인기를 누렸지만 그 어느 작품도 〈크리스마스 캐럴〉에 필적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디킨스만이 시도한 크리스마스 기념비가 되었다.

초기 창작 시절에 디킨스가 얼마나 당대 사람들을 매료시켰는가는 R.H. 혼의 〈새로운 시대정신〉(1844)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의 첫번째이자 가장 긴 장(章)은 디킨스에 대한 호평으로 할애되어 있다.

"뚜렷한 이 시대의 산물…… 총체적이고 완벽한 시대정신에서 나온 천재적 발상…… 그는 이 사회 속에 널리 지속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가 없이 이루어지는 자선모임은 거의 없다. 그는 달변가이다…… 그가 이 시대에 끼치는 영향력은 유쾌하고, 교육적이며, 건강하고 개혁적일 정도로 폭넓다…….

개인적으로 볼 때 디킨스는 그의 작품을 보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의 대화는 온유하고…… 독특한 개인적 행동양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실용적 기술을 요하는 게임을 좋아한다. 또한 걷기를 즐기고 '로저 드 커벌리' 춤을 매우 좋아하며 허튼 구석이라고는 한 치도 없는, 수준높은 실천적 지성인의 인상을 풍긴다."

그는 여러 면에서 진정한 공인(公人)이었으며 자신이 사는 세계에서 적극적인 중심체 역할을 하고,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당시의 가장 훌륭한 만찬 연설가로 인정받았으며 그밖에 그를 묘사하는 최상급형용사로는, 런던 신문계에서 가장 뛰어난 속기사였다는 것과 가장 탁월한 아마추어 배우였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후에는 매우 훌륭한 잡지 편집인이자 최고의 연극 낭송가가 되기도 했다. 천부적으로 많은 재능을 타고난 그에 대해 1870년 6월 10일 〈타임〉지에 실린 사망기사에서 한 기자는 "문학적 천재성은 빼고라도 그는 능력있고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고 몰입하기만 하면 어떤 직업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 시기에 그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인 면 뿐만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가정과 사회생활을 사랑했으며 매우 모범적이고 훌륭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한 번은 요리책을 쓸 생각까지 했을 정도이고,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관계가 다소 소원해지기는 했어도 1844~45년 이탈리아 생활, 1846~47년의 스위스와 프랑스 체류를 빼고는 줄곧 런던에서 살다가 수입이 늘고 아이들이 자라남에 따라 퍼니벌즈인에 있는 아파트에서 더 큰 저택으로 옮겼다. 여기에서 유명한 작가, 신문기자, 배우, 예술가 등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법률가나 사업가, 몇몇의 귀족계층 등 다른 직업의 사람들도 접대했다.

그는 허식없는 사교모임이나, 온화하고 양식있으며 너무 현학적이거나 문학적이지 않은 대화들을 즐겼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광채나는 눈빛과 단정하고 신사다운 외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스스로 "나는 세련된 옷과 장식을 끔찍히 좋아한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절친한 친구이며 후에 그의 전기를 쓴 존 포스터는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 당시의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의 얼굴의 각 부분에 나타나는 명민함, 날카로움, 실천력, 열정적이고 활동적이며 원기찬 모습은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작가라기보다는 행동파 사업가 같은 인상을 주는 듯했다.

광채와 활기가 얼굴 전체에서 번득였다."

디킨스는 자신의 예술에 자부심을 가졌고 그것을 향상시키고 좋은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대중문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작품을 썼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모든 에너지를 예술에만 쏟아붓거나 편협하게 문학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비록 성공으로 끝나지는 못했지만 그 주목할 만한 예가 1846년 〈데일리 뉴스〉(얼마 후 대표적인 진보적 신문이 됨)의 창립 편집자가 된 것이다. 신문기자로서의 경험과 정치적 신념, 여론의 주창자로서 대처할 수 있는 자세, 문학적 창작력을 살리고 소설 독자층의 변덕스러운 기호에 의존하지 않고 고정된 수입을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로 하여금 1840년대에 여러 번 정기간행물을 기획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간신문 일은 곧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실용적 재능이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하는 기회가 곧 주어졌다. 디킨스는 약 10년 이상 비범한 통찰력과 애정을 가지고 아주 정력적으로, 부유한 친구 안젤라 버뎃커츠로의 재정적 원조 속에서 어린 비행소녀들을 위한 감화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그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자선정신은 연설이나 기금모금 활동, 사적인 자선활동을 통해서 실천되기도 했다.

〈돔비와 아들 Dombey and Son〉(1846~48)은 그가 소설가로서의 발전에 있어 비중 높은 작품으로, 훨씬 철저한 구상과 성숙한 사고의 산물이자 "당시 사회에 널리 스며 있는 일반적 불만이 구체적인 사회적 부조리에 관한 관심으로 변하는 첫 작품"(캐슬린 틸롯슨)이었다.

돈으로 인한 타락, 높은 지위에 대한 자만심, "존경할 만한" 가치의 한계 등이 파헤쳐지고, 디킨스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소박하며 단순한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자주 인간의 미덕과 가치가 발견됨을 지적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어린 폴의 죽음은 디킨스의 또다른 유명한 페이소스 넘치는 에피소드를 제공하고 있고 돔비라는 인물에서는 이전의 그 어떤 인물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고 내적인 인물묘사에 대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데이비드 카퍼필드 David Copperfield〉(1849~50)는 이러한 심화된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잠시 떠난 작품인데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유년기를 다룬 부분이 가장 유명하다.

에드먼드 윌슨은 "그의 문학 생애에서 전무후무한 매혹적 분위기를 창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와 작가의 자서전적인 요소 때문에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인 동시에 디킨스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 되었다. 이 작품은 그가 당시에 착수했다가 그만둔 자서전으로부터 소재를 빌려왔고 그에게는 새로운 기법인 1인칭 시점으로 씌어졌다.

그러나 비록 작가 자신에게 의미깊었던 여러 가지 어릴 때의 경험, 즉 아버지가 감옥에 있을때 공장에서 일했던 일, 학교수업과 독서, 마리아 비드넬에 대한 열정, 의회 서기에서 성공적인 소설가로의 변신 등을 다루고 있지만 데이비드는 디킨스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이작품은 미코버라는 인물을 통해 줄거리의 내용보다 훨씬 뛰어난 상상적 효과를 지닌 '디킨스 인물들' 중의 하나를 소개했다. 피크위크, 샘 웰러, 갬프 여사, 펙스니프, 스쿠루지 등도 이러한 인물들에 속한다(교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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