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러시아의 혼란시대(1598~1613)에 자신이 뇌제 이반 4세(1533~84 재위)의 아들로서 1591년 우글리치에서 어린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드미트리 이바노비치라고 주장하며 러시아 왕위를 요구했던 세 사람.
(영). False Dmitry/Pseudo-Demetrius. Dmitry Samozvanets라고도 함.
류리크 왕조의 마지막 차르 표도르 1세(1584~98 재위)가 죽고 그의 처남 보리스 고두노프가 왕위를 계승한 후 첫번째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나 고두노프의 왕위계승에 도전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가 그리고리(유리) 보그다노비치 오트레피예프이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오트레피예프는 수도사가 되기 전에 로마노프가(家)를 자주 드나들던 젠트리 계층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가짜 드미트리는 진정으로 자신이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라고 믿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1601~02년 모스크바에 살며 드미트리 왕자를 자처하던 그는 추방당할 위험에 처하자 리투아니아로 달아났으며, 1603년 그곳에서 러시아 왕위를 얻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며 그 지원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예수회 회원들과 리투아니아 및 폴란드 귀족들의 개인적인 지원을 받아 카자크인과 용병을 모아 1604년 가을 러시아로 침입했다. 그의 병력은 군사적으로는 패했으나 남부 러시아 전역에서 추종자를 모았다. 1605년 4월 차르 보리스가 갑자기 죽자 정부군은 가짜 드미트리 편으로 돌아섰으며, 보리스의 상속자인 어린 아들도 모스크바 보야르들의 손에 살해되었다.
드미트리는 1605년 6월 의기양양하게 모스크바에 입성해 자신을 차르로 선포했다. 그러나 그후 드미트리는 모스크바 궁정의 관례와 전통을 따르지 않고 그와 그의 아내 므니셰크(폴란드 귀족의 딸)를 모스크바로 수행했던 폴란드인들을 편애하고 투르크인들을 유럽에서 몰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그리스도교 동맹에 러시아를 참여시키려고 계획하는 등의 방법으로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소외시켰다. 1606년 5월 그에게 등을 돌린 귀족 중 하나인 바실리 슈이스키는 쿠데타를 일으켜 첫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죽이고 그의 뒤를 이어 차르가 되었다.
쿠데타 이후에도 드미트리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1607년 8월 스타로두프에서 최근 퇴위한 차르임을 자처하는 또다른 왕위 요구자가 나타났다. 이 2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첫번째 인물과 외모가 전혀 달랐음에도 카자크인·폴란드인·리투아니아인, 그리고 이미 슈이스키에 반기를 든 반란자들 사이에서 많은 추종자가 생겼다. 남부 러시아를 장악한 그는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면서 투쉬노 마을에 완벽한 궁정과 행정부를 갖춘 본부를 세웠다(1608. 봄).
이때부터 '투쉬노의 도적'으로 알려진 2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부대를 북부 러시아로 보내 약탈하게 했으며, 마리나 므니셰크가 공식적으로 그를 자기 남편이라고 주장한 후부터는 슈이스키에 맞먹는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슈이스키는 1610년 봄 스웨덴군의 도움을 얻어 '투쉬노의 도적'을 북부 러시아에서 축출했다. 2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칼루가로 도망쳤다. 그는 칼루가로 도주한 뒤에도 왕위를 차지하려 했으나 1610년 12월 자기 부하의 손에 죽었다.
1611년 3월 28일 3번째 가짜 드미트리로서 이반고로드에 나타난 시도르카는 교회집사로 확인되었다. '프스코프의 도적'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모스크바 주변 일대를 약탈하던 카자크인(1612. 3)과 프스코프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1612년 5월 배신당한 뒤에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