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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51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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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05. 4. 23(구력 4. 13), 모스크바 |
국적 | 러시아 |
요약 러시아의 정치가.
차르 표도르 1세(1584~98 재위)의 최고 고문이었고 류리크 왕조의 대(代)가 끊긴 후 모스크바 공국의 차르로 선출되었다(1598~1605). 보리스 고두노프가 통치할 때부터 러시아에는 '혼란시대'(1598~1613)가 시작되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14세기에 모스크바 공국으로 이주해왔던 타타르 귀족가문인 사부로프 고두노프 가문의 한 사람으로서, 뇌제 이반 4세(1533~84 재위)의 왕실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반의 절친한 친구의 딸과 결혼함으로써(1571) 이반의 호감을 산 뒤, 자신의 누이동생 이리나를 표도르 황태자의 신부감으로 줌으로써 보야르(boyar:대귀족)로 상승했다(1580). 표도르가 왕위에 오르기 직전 1584년에 이반 황제는 보두노프를 총명하지 못한 표도르를 보좌하는 후견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명했다. 보두노프를 왕위찬탈자로 생각한 보야르들이 그를 타도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는 자신의 적대자들을 추방하여 러시아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모스크바의 외교업무를 완전히 장악한 보리스 고두노프는 군사행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대외무역을 증진시켰으며, 많은 방어도시와 요새를 건설했다. 또 오랫동안 모스크바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던 서부 시베리아를 다시 식민화했고, 모스크바 교회의 장(長)을 수도의 대주교 신분에서 러시아 총주교의 위치로 높였다(1589). 국내적으로는 관직에 있는 젠트리(service gentry)들의 이익을 보호했다.
표도르가 후계자 없이 죽자(1598), 성직자와 관직젠트리들로 구성된 '젬스키 소보르'(zemsky sobor)는 보리스 고두노프를 왕위계승자로 선출했다(1598. 2. 17). 차르가 된 고두노프는 지적이고 유능한 통치자로서 여러 가지 관대한 정책들을 시행했다. 즉, 사법제도를 개혁하고, 서유럽에 학생들을 유학시켰으며, 러시아에서 루터파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허용했고, 발트 해를 지배하기 위해 리보니아를 얻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반발하는 보야르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로마노프 가문 사람들을 추방하고 반역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은 다만 보야르들의 적개심을 높일 뿐이었고 기근(1601~03)과 뒤따른 전염병으로 인한 러시아 국민들의 고통을 덜게 하려는 보리스 고두노프의 노력도 별 효과가 없게 되자 국민들의 불만도 높아갔다. 그리하여 표도르 황제의 이복동생 드미트리 왕자를 자처하는 사람이(사실 드미트리 왕자는 1591년에 죽었음) 왕위를 주장하며 카자크인과 폴란드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남부 러시아로 쳐들어오자(1604. 10), 많은 러시아인들이 합세했다.
차르의 군대는 처음에는 가짜 드미트리 군대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것을 막아냈으나 보리스 고두노프가 갑자기 죽어 방어선이 무너졌다. 그후 러시아는 폭력에 의한 급격한 체제의 변동, 내전, 외국의 간섭, 사회적 무질서 등으로 특징되는 혼란의 시대로 빠져들었다. 이것은 표도르 니키티치 로마노프의 아들인 미하일 로마노프가 1613년 차르로 선출되어서야 비로소 끝났다.→ 무소르크스키, 보리스 고두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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