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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의 창간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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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1884년 12월에 있었던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로 끝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국적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친일내각이 성립되면서 갑신정변에 가담했던 망명객들에게 사면령이 내려져 서재필에게도 귀국의 길이 열렸다.

그는 1895년 12월말에 귀국하여 월봉 300원을 받는 조건으로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계약기간은 10년이었다. 그러나 중추원 고문으로서의 일은 거의 없었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은 〈독립신문〉의 발행, 독립협회의 창립과 운영, 독립문건립, 배재학당에서의 강의 등이었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동기는 대개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을 계몽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갑신정변 때와는 달리 개화사상이 어느 정도 보급되어 있었으나 국민들은 국제정세에 어두웠다. 그래서 신문을 발행하여 국민의 정신을 깨우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둘째, 서재필이 귀국 직후 접촉한 여러 사람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당시 정부는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여 생활을 보장하는 한편 신문 창간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신문사 설립자금으로 3,000원과 개인 생계와 가옥임대비 명목으로 1,400원을 별도로 지급하여 〈독립신문〉의 창간에 필요한 경비로 모두 4,400원을 지급했다. 서재필에게 자금을 지원하도록 주선한 것은 내부대신 유길준이었는데 그는 신문을 개화의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인식했던 사람이다. 또한 정부가 자금을 댄 이유는 신문을 발간하여 국민을 계몽하겠다는 목적과 함께 일본인들이 발행하고 있던 〈한성신보 漢城新報〉에 대항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일본측은 이 신문이 창간되기 1년 전인 1895년 2월부터 외무성의 보조금을 받아 서울에서 〈한성신보〉를 발행했는데, 이 신문을 통해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고 조선황실을 비방하는 기사를 실어서 정부가 일본측에 항의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정부는 〈독립신문〉의 창간자금을 전액 지원했을 뿐 아니라 신문 우송요금을 할인하고 취재활동에도 편의를 제공하는 특혜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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