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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으로 보아, 문무왕 때 이미 도독을 주 장관의 명칭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 전에는 지방통치조직에 군사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군주가 파견되었고, 문무왕 때 단순히 행정적 외관의 역할에 치중하면서 도독이라고 부른 것 같다. 통일 전에 군주를 임명한 기록은 자주 보이나, 김대문이 한산주 도독으로 임명된 이후 선덕왕 때까지 100년 동안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중대에 와서 그 정치·군사상 중요성이 적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대에 와서 도독은 지방세력과 결탁해 군사행동을 하는 강력한 세력자로 등장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인물은 무열왕계인 김헌창·김흔·김양 등이었다. 이들은 귀족연립적인 정치체제로의 복귀경향에 따라 원성왕계 왕실에 도전해 반란을 꾀하기도 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따르면 통일 이전의 군주·총관을 도독의 전신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삼자의 성격은 각각 다르다.
군주는 군관구의 사령관이었고, 총관은 행정관직이 아니라 문무왕 즉위초에 고구려 공격군의 지휘관에게 붙였던 이름이다.
도독은 통일 후 9주가 정비되면서 생긴 것으로, 정원은 9명이며 관등은 급찬에서 이찬까지에서 임명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664년(문무왕 4) 아찬 군관을 한산주 도독으로 삼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문무왕 때 이미 도독을 주 장관의 명칭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 전에는 지방통치조직 자체에 군사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군주가 파견되었고, 문무왕 때 단순히 행정적 외관의 역할에 치중하면서 도독이라고 부른 것 같다.
통일 전에 군주를 임명한 기록은 자주 보이나, 도독의 경우에는 704년(성덕왕 3) 김대문(金大問)이 한산주 도독으로 임명된 이후 선덕왕 때까지 100년 동안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중대에 와서 그 정치·군사상 중요성이 적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대에 와서 도독은 지방세력과 결탁하여 군사적 행동을 하는 강력한 세력자로 등장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인물은 무열왕계인 김헌창(金憲昌)·김흔(金昕)·김양(金陽) 등이었다. 이들은 귀족연립적인 정치체제로의 복귀경향에 따라 원성왕계 왕실에 도전해 반란을 꾀하기도 했다.→ 군주, 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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