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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포르투갈령 식민지, 특히 브라질에서 국왕이 무상불하한 영지인 카피타니아(capitania : 식민지 행정단위)를 받은 사람.
1533년 포르투갈 왕 주앙 3세는 마데이라 제도(諸島)와 아조레스 제도에서 실시한 카피타니아 제도(制度)가 성공을 거두자 브라질에서 포르투갈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 제도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제도의 시행을 위해 구체적으로 규정들을 마련했는데, 도나타리오는 토지를 무상으로 불하받고 세금 일부를 면제받는 대신 정착민을 모으고, 그들의 정신적 안녕을 돌보며, 침략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농업과 상업을 진흥시킬 특별한 책임을 맡았다.
카피타니아의 토지 가운데 도나타리오 개인에게 주어진 무상토지 이외의 것은 대부분 정착민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했으며 도나타리오는 카피타니아 운영에 드는 모든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 각 카피타니아는 25~26레구아(140~290㎞) 혹은 그 이상의 크기였고, 브라질 해안을 따라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에서 결정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 경계선(그리니치 서경 48~49°사이)까지 내륙으로 뻗어 있었다.
도나타리오는 이론으로는 군주와 거의 맞먹는 권력을 지녔지만 현실로는 영토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충분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어려웠고(인디언을 노예로 만들기가 쉽지 않았으며 16세기에는 흑인 노예들이 대규모로 수입되지도 않았음), 포르투갈 정부의 도움 없이 프랑스인의 침입을 막아야 했으며, 거의 대부분이 포르투갈에서 추방된 범죄자이거나 반체제 인사로 이루어진 무도한 식민지 이주자들을 다루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549년까지 브라질에 세운 12개의 카피타니아 가운데 두아르테 고엘호 페레이라에게 주어진 페르남부쿠와 마르팀 아폰수 데 소사에게 주어진 상빈센테 2군데만이 이익을 가져왔다. 그래서 1549년 주앙 3세는 브라질의 식민지를 구제하기 위해 총사령관으로 토메 데 소사를 임명하여 마누엘 다 노브레가가 이끄는 소규모 예수교단 일행과 함께 보냈다.
이들과 토메 데 소사의 후임으로 파견된 총사령관 멤 데 사(1557~72 재임)는 식민지에 적합한 정책을 수립·시행하고 인디언을 정착지로 모으기 위해 애썼다. 1580년경 8개의 카피타니아가 있던 브라질은 수도를 바이아로 정하고 비록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식민지가 되었다. 도나타리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령관 혹은 총독이라 부르는 관리들로 대체되었으며 1754년에 와서는 모든 카피타니아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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