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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4년 의열단원 김지섭이 일본 덴노를 폭살할 목적으로 도쿄[東京] 니주바시 사쿠라다몬[櫻田門]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
김지섭(金祉燮)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상하이[上海]·시베리아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22년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는 1923년 9월 일본 도쿄 지방을 휩쓴 관동대지진 당시 수많은 한국인이 일본의 군·관·민에 의하여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응징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4년초 도쿄에서 제국회의가 열려 일본 수상을 비롯한 고위 관료와 조선총독이 참가한다는 첩보를 입수, 단장 김원봉의 밀령으로 결사대원으로 선발되어 홀로 일본에 잠입했다.
1923년 12월 20일 윤자영의 소개로 알게 된 일본인 고바야시 히라쿠[小林聞]의 주선으로 상하이 푸둥[浦東]에 정박중인 미쓰이[三井] 화물 소속의 석탄선 텐조야마마루[天城山丸]에 폭탄 3개를 가지고 승선했다. 1923년 12월 30일 후쿠오카 현[福岡縣] 야하타 항[入幡港]에 상륙, 1924년 1월 3일까지 비젠야[備前屋] 여관에 나카무라 히코타로[中村彦太郞]라는 가명으로 투숙했다. 1월 5일 새벽 도쿄에 도착한 김지섭은 와세다[早稻田] 스이호칸[瑞穗館]에서 아침을 먹고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거사 준비를 하던 중, 제국의회가 정초에 휴회한다는 사실을 신문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원래 계획은 제국의회에 돌입해 정부위원석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조선 강점의 원흉들을 일거에 폭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비도 떨어지고 언제 개회될지 모르는 제국의회를 무작정 기다릴 수가 없었다. 차선으로 거사대상을 일본 덴노로 변경했는데, 즉 한국인이 일본궁성에 잠입하여 일본 덴노를 폭살하면,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한 세론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3개의 폭탄을 가지고 오후 7시경 궁성 니주바시 앞에 접근, 궁성 주위를 내왕하며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던 중 그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일본궁성 경비경찰에게 불심검문당하자, 신분이 노출되었다고 판단한 그는 경찰을 쓰러뜨린 후 제1탄을 던졌는데 불발되고 말았다. 다시 일본궁성으로 들어가는 니주바시 정문을 통해 돌진하면서 니주바시 한복판에 제2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어 정문 석책 밖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며, 마지막으로 던진 제3탄도 역시 불발되고 말았다.
그는 곧 체포되었고 고바야시 및 그의 밀항을 도운 일본인들도 잇달아 검거되었다. 그는 체포된 후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일제의 심한 고문으로 병든 몸을 이끌고 1924년 9월 9일 공판장에 나섰다. 제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그는 무죄면 무죄, 사형이면 사형이지 무기징역이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공소를 제기했다. 이듬해인 1925년 8월 12일 도쿄 공소원 공소판결에서도 역시 무기징역으로 확정되었다. 그후 그는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하며 투쟁하다가 1928년 2월 일본 지바 형무소[千葉刑務所]에서 44세로 순국했다.
사전준비의 미비와 훈련이 없었던 것이 거사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 의거는 일본인의 신성불가침적 존재인 덴노에 대하여 폭살을 기도했다는 점에서 일본인들을 경악시켰으며, 우리 민족에게는 한국 침략의 원흉인 덴노를 죽이려 했다는 데서 큰 민족적 긍지를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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