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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농구가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907년 미국인 선교사 질렛이 황성기독청년회의 초대 총무로 있으면서 그곳 회원들에게 농구를 소개하면서부터이다. 그후 질렛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YMCA 회원들이 도쿄[東京] 유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농구복을 만들어 입고 평양과 선천에 원정한 것이 농구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그후 1916년 3월에 미국인 반하트가 YMCA의 간사로 오면서 농구의 보급이 본격화되었다.
1920년 3월에는 농구 사상 처음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서양인 팀과 YMCA 회원 팀 간에 농구경기가 열려 각급 학교에서 농구부가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에는 반하트와 현동완 감독의 인솔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원정 경기를 일본에서 가졌으며 당시 2승 3패의 전적을 남기기도 했다. 여자농구는 1925년 서양 여자 팀과 이화학당 여학생들과의 경기가 최초의 경기였다. 이듬해에는 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팀을 초청해 경기를 가짐으로써 국제경기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며, 1927년 3월 도쿄 YMCA에서 체육부 간사로 있던 F. 브라운을 초청해 농구강습회를 갖기도 했다.
1930년 조선농구협회와 조선심판협회가 발족했으며, 1931년 5월 27일 동아일보가 후원하고 조선체육회와 YMCA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1회 조선농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13개팀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는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1936년 개최된 전 일본 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팀이 출전하여 우승했으며,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 일본 팀 대표로 우리나라의 장이진·이성구·염은현 등이 선발되어 출전하기도 했다. 8·15해방직 후인 1945년 12월 17일 대한농구협회가 창립되었으며 1947년 국제농구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주요경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자의 경우, 농구사상 최초로 출전한 제14회 런던 올림픽 대회(1948)에서 8위, 1958년 아시아 남자농구대회에서는 4위, 1960년에 새로 신설된 제1회 아시아 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2위, 1967년 8월에 개최된 도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는 2위, 1969년 타이에서 개최된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1위를 차지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큰 활약을 보였다. 여자의 경우, 제1, 2회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으며, 1967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열린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소련과 격돌하여 2위를 차지했고, 1968년 도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하는 등 국제무대에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979년 제8회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2위, 1982년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1위,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에서는 2위를 차지하는 등 역대 올림픽 대회 사상 단체 구기종목으로는 처음으로 메달을 획득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1986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남녀 모두 준우승을 차지했으나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에서는 남녀 각각 9위와 7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1990년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여자 우승, 남자 3위를 차지했으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 때는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1994년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여자 팀이, 2002년 제14회 부산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남자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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