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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3. 1. 13, 이탈리아 메차나 코르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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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87. 7. 29, 이탈리아 스트라델라 |
국적 | 이탈리아 |
요약 이탈리아의 정치가.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좌파로서 이탈리아 총리를 3회 지냈다. 그는 여러 당파를 같은 내각에 함께 참가시키는 '트라스포르미스모'(trasformismo:변환주의) 전략으로 매우 안정된 정부를 이끌었다. 파비아에서 법과대학을 졸업한(1834) 뒤 집안 영지를 관리하며 몇 년을 지냈다.
유럽이 혁명으로 큰 변동을 겪고 있던 1848년 그는 제1차 피에몬테 의회에 참석할 대표자로 뽑혔고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맡았다. 의회 의원으로서 그는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총리인 카보우르 백작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그가 1853년 극좌파 민족주의자인 주세페 마치니가 계획한 밀라노 봉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그 봉기가 실패할 것을 미리 내다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1859년 카보우르가 사임한 뒤, 오스트리아에서 새로 피에몬테로 병합된 롬바르디아 지방의 브레시아 지사로 잠시 일했다.
1861년 이탈리아가 정치 통일을 이룩한 뒤 허약한 연립 내각이 구성되었고 그는 공공사업장관(1862), 해군장관(1866), 재무장관(1867)을 지냈다. 1873년 우르바노 라타치가 죽은 뒤 좌파의 명목상 지도자가 되었고 1876년 3월에는 총리가 되었으며 그후 11년 동안 이탈리아 정치를 지배하는 유력한 인물로 군림했다. 1878년 3월에 일어난 정치의혹 때문에 그의 내각은 온건한 자유주의적 개혁을 미처 실행하기도 전에 무너졌다.
그해 12월에 다시 권력을 잡은 그는 보다 보수적인 내각을 구성해 8개월 동안 이끌었다. 그가 1881년 5월에 새로 구성한 내각은 1887년 7월까지 활동했는데 이 기간은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그의 내각이 이룩한 주요개혁은 선거권을 인구의 2%에서 7%로 확대한(1882) 것뿐이었다. 1882년 데프레티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및 독일과 3국 동맹을 맺었고 그뒤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887년 1월 도갈리 전투에서 이탈리아 병사 500명이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살해당하자 그의 내각은 총사퇴했다. 4월에 다시 총리로 선출되었지만 몇 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탈리아가 통일된 뒤 처음에는 여러 정당과 파벌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정치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완전한 정당 정치는 거의 불가능했다. 데프레티스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트라스포르미스모' 정책을 완벽하게 시행했다. 그는 정당에 상관없이 우파와 좌파를 모두 장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의회 안에 자신의 추종 세력을 형성했고 우파와 좌파를 바꿔가며 연립 내각을 구성해 총리직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
카보우르도 이탈리아 초대 총리로서 똑같은 방법을 썼으나 데프레티스에 이르러 이 관행은 이탈리아 의회 정치의 기술로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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