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904. 2. 4 |
---|---|
사망 | 1992. 7. 11 |
국적 | 중국 |
요약
중국 중앙정치국 위원.
(병). Deng Yingchao. (웨). Teng Yingch'ao.
저명한 사회정치 활동가이며 부녀운동지도자이고,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부인이다. 광시 성[廣西省] 난닝[南寧]에서 태어났으며, 원적은 허난 성[河南省]이다.
1913~20년에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에서 초등교육과 사범교육을 받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919년 5·4운동이 일어나자 저우언라이·마쥔[馬駿]·궈룽전[郭隆眞] 등과 함께 톈진 학생애국운동을 주도했으며, 1920년 다시 이들과 함께 '각오사'라는 진보단체를 조직했다. 1924년 톈진 여성계 국민회의 촉성회를 만들었다. 그녀는 톈진의 초기공산주의 청년단원이었고, 1925년 중국공산당의 당원이 되었다. 그해에 광둥[廣東]으로 가 중국공산당 광둥 지구위원회 위원 겸 부녀부장을 맡았고 또 저우언라이와 결혼했다.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이 이루어져 공산당원은 개인 신분의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1926년 거행된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27년에 국공합작이 깨어지자 상하이[上海]에서 비밀공작 사업을 하면서 동시에 중공 중앙 부녀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32년 장시 성[江西省] 남부와 푸젠 성[福建省] 서부에 있는 중국공산당의 중앙 근거지로 들어가 몇 안 되는 여성 참가자로서 1934년부터 홍군과 함께 장정의 길에 올랐다.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후 국민당 중앙정부의 전시소재지였던 우한[武漢]·충칭[重慶]에서 각계의 부녀자들과 함께 전시아동보육회를 조직하여 전쟁지역 어린이의 생명과 안전을 지켰다. 1938년에 열린 국제 반침략운동대회에서 중국 분회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국민참정회의 참정권을 맡은 그녀는 단결항전의 원칙을 지켜내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으나, 1941년 '환난[皖南:안후이 성 남부] 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둥비우[董必武] 등과 함께 참정회 출석을 거부했다.
1939~46년에는 대부분 충칭에 머물러 있으면서 중공 중앙남방국위원 겸 부녀위원회 서기로 일했다. 1945년 중국공산당의 제7회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중앙부녀위원회 부서기를 맡았다. 1946년 국민정부의 초대로 이루어진 정치협상회의에 참여한 뒤, 같은 해 국제민주부녀연맹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1949년 이후 제1회부터 5회까지의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무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1, 2, 3회 중국대륙부녀연맹의 부주석과 제4회 명예주석을 지냈다.
1956년부터 줄곧 중공중앙위원을 지냈으며, 장칭[江靑] 일파가 제거된 뒤 1976년 겨울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78년 중국공산당의 제11회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약칭 三中全會)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겸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2서기로 선출되었다. 1983년에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6차 전국위원회 1차회의에서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으로 뽑혔다. 1988년 3월에 이 직책에서 물러났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