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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6. 1. 4, 미국 일리노이 피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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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9. 9. 7, 워싱턴 D. C.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정치가.
케네디 및 존슨 행정부 때 상원에서 공화당 의원들을 이끌었다. 미네소타대학교에서 공부했으나 졸업을 앞두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귀향하여 여러 사업에 손을 대다가 1926년 시재정위원으로 선출되어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30년의 총선 출마는 실패로 끝이 났지만 2년 후 재도전하여 당선되었다. 공화당 내 보수파에 속했던 덕슨은 사회보장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뉴딜 정책에 반대했으며 외교정책에 반대하고 고립주의를 옹호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결정을 초당적으로 지지한 것을 계기로 이후에는 온건하고 유연한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1948년 심한 눈병으로 의원직에서 사퇴했으나 재임중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므로 피킨에서 개인법률사무소를 개설했다. 2년 후 건강이 회복되자 상원에 복귀했다. 1950년대에 에버렛 매킨리 덕슨은 공화당 내의 이른바 '원로보수파'에 속했다. 1952년의 대통령후보지명 전당대회에서는 로버트 A. 태프트 상원의원을 후원했으며 1950년대 중반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조지프 A. 매카시가 불신임당할 때까지 그의 반공산주의 노선을 지지했다.
1959년 상원 소수당 지도자로 선출되어 공립학교에 기도시간을 마련하는 보수적인 정책을 옹호했지만 1960년대에는 몇 가지 주요한 자유주의적 법안, 즉 1964년의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및 시민권법, 1965년의 투표권보호법 등을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덕슨은 비평가들이 '늪의 마법사'(the wizard of ooze: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가 아니라)라고 부르는 원인이 되었던 풍부한 저음의 우렁찬 연설로 말미암아 선거구·상원·텔레비전을 통하여 대중의 우상으로 군림했다. 1968년 선거에서 승리했으나 이듬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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