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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니콜라 다부

다른 표기 언어 Louis-Nicolas Dav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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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70년 5월 10일, 프랑스 아누
사망 1823년 6월 1일,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장군.
Duc d'Auerstedt, Prince d'Eckm대체이미지hl이라고도 함.

나폴레옹의 야전(野戰)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귀족 출신으로 '앙시앵 레짐'(구체제) 아래서 최고의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혁명지지 반란을 일으켰다(1790). 1792~93년 벨기에 원정 때 큰 공을 세웠으며 샤를 뒤무리에 장군의 반역행위를 막아 이름을 떨쳤다(1793. 4). 준장으로 진급했으나 1793년 7월 귀족들을 프랑스군에서 몰아내는 법령에 따라 사임해야 했다. 그러나 반 귀족주의를 고집하던 자코뱅당이 세력을 잃자 다시 군대로 불려갔고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 원정(1798~99)에 참여한 뒤 사단장으로 진급했다. 1801년에는 폴린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누이)의 시누이인 루이즈 이메 르 클레르와 결혼했다.

정예부대인 제3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아우스터리츠(1805)·아우어슈테트(1806)·예나(1806)·아일라우(1807)를 비롯해 에크뮐(1809)·바그람(1809)에서 벌어진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는 데 눈부신 활약을 했다. 1808년 나폴레옹에게서 공작작위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에크뮐 공(公)이 되었다. 다부는 실패로 끝난 러시아 원정(1812~13)에서도 훌륭하게 책임을 다했고 그뒤에 함부르크를 되찾기도 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군에서 물러났으나 백일천하 때 육군장관이 되어 다시 제정(帝政) 프랑스를 위해 일했다.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뒤 다부는 파리 협약(1815. 7. 3)에 서명함으로써 승리한 동맹국들에게 파리를 개방했다. 그는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루아르 강 유역에 남아 있던 나머지 제국군대의 사령관으로 계속 일했다. 복고한 부르봉 왕가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1817년 8월 이를 받아들여 프랑스의 귀족으로 인정받는 한편 작위와 칭호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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