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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다른 표기 언어 南漢山城 동의어 사적 제57호

요약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백제 온조왕의 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1624년에 인조가 총융사 이서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하여 1626년에 공사를 마쳤다. 4문과 16암문, 성가퀴 1,897개, 옹성, 성랑, 우물, 샘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공사는 승려 각성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했는데, 7개의 절을 지었다. 지금은 장경사만 남아 있다. 그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을 확장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다. 1963년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숭렬전

남한산성에 있는 숭렬전(조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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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57호. 둘레는 약 8,000m.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晝長城)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에는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溫祚)의 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1624년(인조 2)에 왕이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하여 1626년 공사를 끝마쳤다.

4문과 16암문(暗門), 성가퀴[女墻: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 1,897개, 옹성(甕城), 성랑(城廊), 우물, 샘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공사는 승려 각성이 도총섭(都摠攝)으로서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했는데, 이들을 위해 7개의 절을 지었다. 지금은 장경사(長慶寺)만 남아 있다. 그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을 확장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은 상궐(上闕) 73칸 반, 하궐(下闕) 154칸이었다. 1688년(숙종 14) 좌덕당(左德堂)을 세웠다. 1711년(숙종 37)에 종묘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우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모실 우실(右室)을 두었다. 1624년에 세운 인화관(人和館:客館)을 1829년(순조 29)에 수리했다. 관청으로 좌승당(坐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 등과 군사기관으로 비장청(裨將廳)·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을 두었다.

또한 종각·마구(馬廏)·뇌옥(牢獄)·온조왕묘·성황당·여단(塾壇) 등을 두고, 승군을 총괄하는 승도청(僧徒廳)을 두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관(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서장대(일명 守禦將臺)만 남아 있다. 이밖에 현절사(顯節祠)·연무관(演武館)·지수당(池水堂)·영월정(迎月亭)·침과정(枕戈亭) 등이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했다. 오늘날까지 여러 차례 보수를 하고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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