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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함남 함흥, 1919. 11.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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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14. 6. 9, 서울 |
국적 | 한국 |
요약 미술가.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며 1977년 추상과 구상의 조화를 꾀하는 조형주의 미술을 발표했다. 함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밤의 정물>로 입선하여 본격적으로 작품을 시작했다. 1977년 미국 TMF 미술관에서 '조형주의 선언전'을 열어 조형주의를 세계 최초로 발표했으며, 이후 미국에서 현대적인 조형성을 추구하기 시작해 조형주의를 이루었다.
미술가. 191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1936년 함흥고등보통학교 재학중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 〈밤의 정물〉로 입선하여 공식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도쿄 미술학교 유화과에서 공부했으며, 1955~61년 프랑스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그랑 쇼미에르에 유학했다.
1967~79년 미국에 머물면서 필라델피아 무어아트 칼리지의 초빙교수로 있었다. 1977년 워싱턴 특별구의 TMF 미술관에서 '조형주의 선언전'을 열어 이질적인 요소와 형식들을 하나의 화면에 조화시키는 조형주의(harmonism)를 세계 최초로 발표했다. 그의 조형주의는 양극적인 모든 존재의 상황을 함축한다. 즉 짝수와 홀수, 음과 양, 동(動)과 정(靜), 사실과 추상, 현실과 이상 등 서로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을 통해 미술이 세계의 한 면만 표현하는 것을 극복하고 총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추상과 구상의 병존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이루고 있다. 1955년까지의 화풍은 사실주의적 경향의 자연주의였으나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인 1956년에 그린 〈세 얼굴〉을 통해 입체파풍의 작업을 했다. 1957년부터 구상적인 측면은 없어졌고, 1960년대초부터는 추상화적 경향을 띠게 된다. 1967년 이후 미국에서는 탄피·못·자동차바퀴·시계부속품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캔버스에 붙여 현대적인 조형성을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화면을 여러 면으로 나누어 각기 독립적인 내용을 담기도 했다. 그의 조형주의는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1980년까지 성신여자대학교 교수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임했고, 1987년 중소기업중앙회 신축회관에 국내 최초로 판유리로 된 벽화 〈군동(群童)〉을 제작했으며, 1990년 파리의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대규모의 '김흥수 조형주의전'을 가졌다. 1990년대 이후로는 작업에 전념했다. 2000년대까지 구순이 넘은 노령에도 작업과 전시를 지속했다. 2010년 91세의 역대 최고령으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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