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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8, 평북 용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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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0 |
국적 | 한국 |
요약
대일 무장항쟁의 지도자였으며, 해방 후에는 정치에 몸을 담고 제7, 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교편을 잡았다가 1918년 9월 10일 중국 상하이로 망명, 1919년 중국 구이저우 강무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이 되었다. 1921년 상해임시정부 국대군 창설계획에 참여했으며, 자유시참변 이후 소련·만주 지역 독립군의 총연합을 목표로 발족된 '한국의용군사위원회'에 가담, 1922년 24세에 한국의용군사령관이 되어 항일전을 지휘했다. 1925년 10월 중국혁명군 동로군사령부에 들어가 1945년 4월 광복군사령부 참모장에 취임하기까지 중국군 소장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1948년 8월 28일 귀국 후 우리나라 군에 입대하여 손원일·이응준·채병덕·송호성 등과 함께 정부수립 후 최초의 장성인 육군 준장에 임관되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참모학교 교장을 거쳐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육군사관학교 교장시절 육사 8, 9기생들과의 인연으로 혁명정부의 외무부장관에 취임했으며, 1963년 한국통일촉진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본명은 김홍일(金弘日). 1915년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마치고 한때 황해도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민족사상을 바탕으로 후배양성에 몰두했다. 교직생활 4개월 만에 비밀결사조직 구성 혐의로 용암포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탈출, 1918년 9월 10일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19년 중국 구이저우[貴州] 강무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이 되었는데, 이때 그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왕웅이라 고쳤다. 1921년 상해임시정부 국대군 창설계획에 참여했으며, 자유시참변 이후 소련·만주 지역 독립군의 총연합을 목표로 발족된 '한국의용군사위원회'에 가담, 1922년 24세에 한국의용군사령관이 되어 항일전을 지휘했다. 1925년 10월 중국혁명군 동로군사령부에 들어가 1945년 4월 광복군사령부 참모장에 취임하기까지 중국군 소장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1948년 8월 28일 귀국 후 우리나라 군에 입대하여 손원일·이응준·채병덕·송호성 등과 함께 정부수립 후 최초의 장성인 육군 준장에 임관되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참모학교 교장을 거쳐 6·25전쟁 당시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한강방어전을 수행하였고, 국군 제1군단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 반공외교의 일환으로 자유중국대사로 임명되어 제1공화국 내내 주중대사로 재직하면서 양국간 외교에 주력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육군사관학교 교장시절 육사 8, 9기생들과의 인연으로 혁명정부의 외무부장관에 취임했으며, 1963년 한국통일촉진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추진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조국수호국민협의회 대표집행위원에 취임하여 한일협정체결반대운동에 앞장섰다. 그로 인해 1965년 8월 구속·기소되었다가 1966년초에 기소취하로 풀려났다. 1967년부터 정계에 투신, 서울 마포선거구에서 신민당(야당) 후보로 출마하여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 의장에 선임되었고, 1971년 당수 권한대행, 제8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었다. 1971년 7월 제1야당이던 신민당 당수로 추대되었으나 1973년 1월 18일 신민당 탈당성명을 내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그후 1980년 국정자문위원과 국방부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저서로는 〈국방개론〉·〈군대정신론〉·〈대륙의 분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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