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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5, 평북 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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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9, 서울 |
국적 | 한국 |
요약 김태준은 우리나라 최초로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조선소설사>와 <조선한문학사>를 썼다. 오랫동안 그의 연구업적은 사장되었다가 1988년에 와서 해금되었다.
호는 천태산인(天台山人). 우리나라 최초로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조선소설사〉와 〈조선한문학사〉를 썼다.
소지주이며 완고한 한문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웠으며 '신동'이란 말을 듣고 자랐다. 15세 때 운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년 동안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연변공립농업학교에 입학, 3학년 때 이리공립농림학교로 전학했다. 1926년 뛰어난 한문실력으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한 뒤, 1931년 3월 같은 대학 법문학부 중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시절 잡지 〈신흥〉에 관계했으며, 1931년에는 김재철·이재욱·조윤제·이희승 등과 조선어문학회를 조직했다. 그뒤 최초로 향가 및 이두를 연구한 오쿠라 신베이[小倉進平] 밑에서 국문학 유산을 발굴·정리하는 데 힘썼다.
동료 김재철이 요절하자 1939년에 그가 지은 〈조선연극사〉를 펴냈다. 명륜학원 강사를 거쳐 1939년 2월 경성제국대학에서 다카하시[高橋亭]의 후임으로 조선문학을 강의했다. 1941년 경성콤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이 조직과 관련을 맺고 사회주의 운동을 펼쳤다. 1944년 이 그룹의 일원으로 검거되었다가 막 출옥한 박진홍(朴鎭洪)과 재혼하였고, 같은 해 11월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인 연안으로 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11월 서울로 돌아와 정치일선에 나서 조선공산당 서기국원, 남로당 중앙위원 및 문화부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 및 문화부 차장,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6년 2월 조선문학가동맹 주최로 열렸던 조선문학자대회에서 '문학 유산의 정당한 계승방법'에 대해 연설했다. 1947년 7월 '모종의 음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같은 해 11월 서울 수색 근처에서 사형당했다.
사형을 선고받기 전 최후진술에서 "상아탑에서 고전만 연구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한다. 오랫동안 그의 연구업적은 사장되었다가 1988년에 와서 해금되었다.
평론세계
대학 졸업반인 1930년 〈동아일보〉에 국내 최초의 비교문학적 국문학사인 〈조선소설사〉(1930. 10. 31∼1931. 2. 14)를 68회에 걸쳐 연재하여 국문학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조선소설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사로서, 우리나라 소설의 발생과 기원부터 당대의 프롤레타리아 소설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이것은 1933년에 많은 첨삭과 개편을 해 단행본으로 펴낸 이후, 소설사 연구의 초석이 되고 있다.
1931년 단행본으로 펴낸 〈조선한문학사〉는 국문학이 우리 문학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한문학을 소홀히 하던 당시의 흐름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고, 이후 한문학과 국문학을 아우르는 온전한 문학사 연구 및 서술의 토대가 되었다. 두 책은 비록 제한된 자료와 실증적 방법상의 한계를 지니고 있으나, 각 분야에서는 최초의 통사적 기술로서 국문학 연구사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시가를 연구한 〈조선가요개설〉(조선일보, 1933. 10. 20~12. 21)·〈시조기원에 대한 재고〉(학등, 1934. 1)·〈가사론〉(조선일보, 1934. 2. 25~3. 4)·〈조선민요의 개념〉(조선일보, 1934. 7. 24~8. 4) 등과 소설사를 연구한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동아일보, 1935. 1. 1~9)·〈조선소설발달사〉(삼천리, 1935. 12~1936. 1)·〈홍길동전 연구〉(신동아, 1936. 8)·〈구운몽의 연구〉(조선문학, 1936. 10) 등을 발표했다.
문학유산의 실증적 정리 및 대중적 보급에도 노력하여 〈조선가요집성〉(1934)·〈원본 춘향전〉(1939)·〈고려가사〉(1939)·〈청구영언〉(1939)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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